<책을 펴내며>
무無에 이르는 도정道程이었다
여든네 번째 가을을 맞는다.
몸이 떠나기를 기다리며
묵은 곳간을 털었다.
심연의 바닥에 두레박을 기울였으나
더는 퍼올릴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없어져도 무방할
그림자의 잔해.
양피지 위에 썼다가 지운, 그리고 다시 눌러쓴 글자들,
결국은 무無에 이르는 도정道程이었다.
창밖 까마귀가 가아 가아 가라고 한다
바람 따라 갈란다
허수입虛受入
등 뒤에 와닿는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참 좋다.
이 글만으로 뭉클하며, 가슴이 저릿하다.
선생님의 가을이 길고 깊어 아쉬움없이 풍성하게 비울 수 있기를... 합장한다.
방대한 지식을 통한 불교의 깨달음, 심오한 철학적 통찰을 다시 대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또 감탄한다.
『철학 수필』에서 만났던 작품들도 새 롭 다. '실험수필'을 위한 제언을 읽으니 그때의 열정이 떠오른다.
법정 스님의 귀한 편지, 보르헤스와 오에 겐자부로, 몽테뉴와 괴테가 가까이 느껴진다.
"신발 한 짝은 어깨에 메고 가지요" 선집 『까마귀』를 출간하고 김은중 선생이 한 대담은 관여 선생님의 심중을 잘 이끈 질문이 돋보인다. 그 깊이에 다가갈 수는 없지만 공부거리가 무궁무진하다.
거듭 고개 숙이며 한 장 한 장 귀하게 새긴다.
* 허공에 구름 지나간 자취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하여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를 되뇌게 됩니다. "무無보다 더 실재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베케트의 직품을 파고 들었지요. (185쪽)
* 1969년부터 <신행불교>의 편집 일을 맡아 10년간 봉직하는 동안 언론 매체에서 청탁이 왔고 발표된 글에는 '수필가'라는 호칭이 뒤따랐다. 이름의 도盜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나는 수필가가 되었고 1996년 첫 수필집 『빈배에 가득한 달빛』 을 출간하였을 때 법정 스님께서 보내주신 엽서에는 낯익은 만년필의 굵은 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가난이 우리를 이만큼 키웠습니다."
스님은 '내 가난'을 편들어주시려 '우리를'이라고 덧붙이는 배려를 잊지 않으셨다. (219쪽)
* 문학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하는 것에 불과하다던 롤랑 바르트의 말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정신사는 역사를 무시할 수 없으며 선배의 족적을 답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위에 벽돌 한 장을 올려놓는 것이 작가가 아닌가.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는 3,000년 뒤 제임스 조이스에 의해 『율리시즈』로 재탄생 했고, 5,000년 전, 중국의 『주역』이 노자에 의해 『도덕경』으로 갈음되었다. 헤르만 헤세는 주역과 노장사상을 뼈대로 『유리알 유희』라는 명작을 써냈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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