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성질대로 떠난다

칠부능선 2018. 10. 4. 19:51

 

성질대로 떠난다

노정숙

 

 

시할머니 별호가 호랑이였다. 반듯한 가르마에 쪽진 머리는 흐트러진 적이 없고, 걸을 때면 양팔을 흔들며 걷는다. 채식을 즐기시고 주로 갖은 나물에 비벼서 후다닥 드신다. 주위에 누구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꾀를 부리는 것을 보면 벼락같은 호령이 떨어진다. 돌아가실 때까지 부엌살림을 주관하시고 몸을 재게 부리셨다. 그날도 아침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하신 후 돌아가셨다. 동백이 이울듯 시들지 않고 단박에 생을 놓았다. 향년 93세였다. 홀로 우뚝 서서 우렁우렁 뜻대로 살다 성질대로 깔끔하게 떠나셨다.

 

시외할아버지는 유순하셨다. 딸의 머리도 빗겨주고, 연필도 가지런히 깎아주셨다. 큰소리 내는 법 없이 조용조용 집 안팎을 살피셨다. 사탕과 과자를 좋아하고 무른 음식을 즐겨 드셨다. 시외할아버지와 시외할머니는 구순하게 잘 살아 회혼례를 맞았다. 술을 즐기며 호탕했던 외할머니는 말년에 정신이 흐려지긴 했으나 끝까지 몸을 부리다 돌아가셨고, 그 후 외할아버지는 누워서 10여 년을 보냈다. 몸 속 수분은 다 날아가고 살과 뼈가 맞붙을 때에 이르러 소멸하셨다. 회화나무 한 그루가 시간을 다 쓰고 낙엽이 되어 말라 바스러져 버린 모습이었다. 향년 94세였다. 서두르는 법 없는 성격대로 차분차분 돌아가셨다.

 

캐나다 출신 의사 노먼 베쑨은 성질 때문에 일찍 죽었다. 주위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고집대로 살았다. 그는 당시 치명적이었던 폐결핵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면서 부인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이혼을 한다. 요양원에서 발견한 새로운 치료법으로 완쾌한 후 돌아와 다시 구혼을 한다. 어렵게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너무 앞서 가는 베쑨의 모험적인 발걸음을 부인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 여자와 두 번 이혼을 한 것도 그의 급한 성질 탓이다. 그는 의사로서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전쟁의 최전선까지 다가갔다. 중국 전투지역에서 40시간을 쉬지 않고 71건의 수술을 했다. 장갑도 끼지 않고 수술을 하다 결국 상처를 입고 패혈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49년, 그의 생은 보통 사람 몇 배의 경험을 했다. 잘 마른 장작의 불꽃처럼 화르르 타버렸다. 전력질주, 성질대로 단번에 떠났다.

 

열렬하게 산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시간도 열렬하고 급하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단박에 넘는다. 느긋한 성격은 오랜 시간을 두고 몸의 진기를 빼고 겨울나무처럼 다 벗고 나서야 간다. 짧은 시간에 가는 죽음이나 오래 준비된 죽음이나 황망한 건 마찬가지다. 애통한 죽음에 애꿎은 시간을 탓해보지만, 돌아보면 시간이 모자라서 못하는 일보다 열정이 모자라서 못한 일이 더 많다.

마지막 모습까지 시외할아버지를 똑 닮은 어머니의 성정과 시할머니를 그대로 닮은 강한 기질의 아버님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자유의지보다 강한 유전자의 내력대로 살게 된다. 무결점의 강건한 가계와 부지런한 기질을 타고 난 사람은 갑이다.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으니 공평하지 않은 시작이다.

무작위로 태어났지만 살아내는 일은 선택의 연속이다. 크게는 결혼과 집을 사고파는 일, 작게는 여행이나 물건을 고르는 일이다. 나는 이런 일들을 비교분석하고 심사숙고하는 것보다 단박에 결정한다. 냉철하지 못한 결정을 책임지기 위해 끙끙대기도 한다. 직관으로 관통할만한 깜냥도 안 되면서 실수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후회나 반성은 없다. 그 순간순간에 몰두했다.

나는 비교적 강단 있는 몸을 받았다. 데이트를 할 때도 친구들과 걸을 때도 나 혼자 앞장 서 걷고 있었다. 한때 별명이 불자동차였다. 시나브로 몸이 속도를 잃고 소소히 신음하기 시작했다. 우울해진 몸에 부산한 생각들을 긍정 쪽으로 밀어붙인다. 마음껏 입고 먹고 마시고, 편안히 누울 집이 있다.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사람과 풍경이 있다. 지금껏 누린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언제든 떠나도 좋다. 속전속결이면 더욱 좋겠다.

 

 <좋은수필>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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