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라고 아픈
노정숙
신부는 신랑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신부는 아직 콩깍지를 쓰고 있군요.
신랑은 신부가 천사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신랑도 아직 환상에 빠져 있군요.
두 사람 다 결혼이 처음이니까 그렇죠.
신부, 내 말을 복창하세요. 남자는 모자란 사람이다.
신랑, 복창하세요. 여자는 아픈 사람이다.
조카 결혼식에서 주례는 푼푼한 농담에 이어, 신랑신부에게 난처한 덕담을 한다. 내가 30년을 살고 나서야 터득한 것을 단방에 알려주니 헛웃음이 난다.
몇 해 전부터 젊은이들 중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세대가 늘고 있다. N포세대로 향하는 요즘, 남녀가 결혼식장에 나란히 선 것만도 대견하다.
주례는 이들의 평온한 앞날을 위해 환상을 깨고 연민을 처방한다. 환상이 유리그릇이라면 연민은 질그릇이다. 깊고 그윽한 질그릇의 멋은 미덥다.
질그릇도 오래 어루만지면 빛나지만, 투명하고 산뜻한 유리그릇이 좋을 때가 있다.
이 격렬한 세상에서 환상 없이 어찌 살아내겠는가. 나는 저들이 환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단단한 환상으로 호호노인이 될 때까지 서로에 대해 콩깍지를
벗지 않기를 바란다. 환상을 믿는 마음은 순수하다. 순수한 마음은 청춘이다. 청춘은 꼼수나 노림수가 없고, 오직 열정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간다. 처음 만날 때의
간절한 마음이라면 극복하지 못할 게 없다. 삶이 극복할 일이 아니길 바라지만 살다보면 시시로 시험대에 오른다. 시험대에 올라서도 주눅들지 않는다면 언제나
생은 봄날이다.
아침마다 얼굴이 팅팅 붓고 발목이 시큰거려도 눈을 질끈 감는다. 정신이 자주 깜박여도 묵묵히 받아들인다. 자연스러운 노화의 징후다. 결코 나만의 병이 아니다.
나는 이미 성性에서 자유로워 ‘모자란’에서도 멀고 ‘아픈’에서도 먼,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고 여긴다. 내 안에서 못난 것들이 뻐세게 고개를 쳐든다.
각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는 날까지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에 알게 된 시인의 아이디 ‘mogiran’을 보고, 능청과 해학에 무릎을 쳤다.
그는 분명 꽉 찬 사람, 아니 일찍이 각성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남편이 정년퇴임을 하고 난 후 비로소 그가 모자란 남자라는 걸 알았다. 평생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가족을 부양한 가장, 과묵한 성격의 완벽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람을 찬찬히 보니, 은행 자동기기에서 현금인출을 못 하고, 집안일은 아예 백치 수준이다. 못 하나를 박으려면 손을 다치거나 망치로 벽을 찍어놓는다.
벽시계의 전지를 바꾸면서 시계유리를 깨트린다. 그 단순한 걸 못하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여자는 직감으로 알고, 남자는 배워야 아는 존재라는 말을 듣고 보니 부끄럽다. 직감이 빠른 여자는 제 꾀에 넘어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병에 걸리면 스스로 눈이 멀고 귀를 막기도 한다. 그 병으로 인해 주례 앞에 선다. 그때는 아무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긴 당부가 괜한 걱정 같기도 하다. ‘남자는 모자란 사람이다’ ‘여자는 아픈 사람이다’ 저 말을 따라 하면서 속으로 코웃음 지었을 수도 있다.
바른생활이 결혼생활의 정답은 아니다. 모범답안을 빤히 알면서 가지 않은 길, 샛길을 넘보는 게 인간이다. 서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서로 가엾이 여기며 토닥여주는 마음이 없다면 한 지붕 아래의 하루해도 너무 길다. 그래서 생의 저물녘에 스며드는 연민은 열정보다 귀한 감정이다.
모자란 남자가 청소기를 돌리는 것만도 감지덕지다. 걸레질까지 바라는 건 과욕이다. 난해한 방법으로 분리수거를 하고, 빨래를 털지 않고 척척 걸쳐놓는 것도
귀엽게 봐야한다. 노상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지만 무언가 혼자 즐길 거리를 찾으라고 해도 내 말은 그의 귓전에 머물지 못 한다.
직감보다 배우는 걸 즐기는 나, 배워야 안다는데도 배우는 걸 마다하는 그, 본시 성정이 다른 것을 나는 왜 놓지 못하는 걸까.
스스로 아프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나야말로 병이 깊은지도 모른다.
모자라고 아픈 남녀가 만나 서로 완벽한 척, 안 아픈 척하며 부대껴야 하는 결혼, 절절하고도 애틋하다.
<에세이문학> 2019, 봄 . 통권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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