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화가, 이흥덕을 찾아서
그럼에도 불편한 진실
노정숙
그림으로 말하는 사람을 화가라고 한다.
단박에 다가오는 친절한 그림도 있고, 생각을 감추고 왜곡하고, 에둘러 말하는 난해한 그림도 있다. 난해한 그림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그린 건가요?” 화가에게 묻고 싶어진다. 이흥덕의 그림은 다양한 군상이 왁자해서 어디에다 눈을 맞춰야할지 마음이 분주하다.
봄기운 한창인 4월, 김태헌 편집장과 이흥덕 화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창고 형 작업실 정면에 300호 두 개를 세운 무채색의 그림 ‘불안의 에티가’가 압도한다. 크고 작은 그림들과 물감으로 빼곡한 이 작업실은 10년 되었다고 한다. 매산리 산자락 자동차정비소였던 창고에 귀물이 쌓여간다.
미리 살펴본 화집에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최근에 내가 본 작가 자화상은 회색과 검정으로 강하고 무뚝뚝한 모습 떠올렸다. 그러나 화가의 얼굴은 생판 다른 선한 맑음,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화폭에 쏟았기 때문인지 약간 수줍은 모습에 말수도 적다.
화집에서 밝힌 작가의 말이다.
“삶은 상대성에 의해 구별되어 있다. 즉 좋음과 나쁨, 선과 악, 하늘과 땅, 많음과 적음 등등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연결되어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여유와 허탈감, 선과 악의 도덕과 응징, 남과 여의 배설과 잉태, 나는 동시에 그것들 전부를 보기를 원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감을 갖고 싶다. 관찰자로서, 때로는 각성자로서 통찰하기를.”
선택과 집중을 버리고 모두를 아우르겠다는 생각은 난만한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톺아본다.
1983년 ‘서울’에서는 멀리 화산이 폭발하여 촘촘히 붙은 집들 위에 불덩이가 떨어지고, 그 지붕 위로 사람이 쫒기고 있다. 와중에도 생은 준엄하다는 듯, 굴뚝에서 연기가 풍성히 피어오른다. ‘쫒기는 사람들’의 불안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무표정이며 왜 다리를 벌리고 있는 걸까. 이들처럼 의식 없이 멍하니 서 있던 내 모습을 겹쳐본다. 그럼에도 무장해제한 허술함은 인간적이다.
등을 돌리고 있는 소녀가 자주 나타나는 건 무얼까. ‘그녀는 바람 부는 들판으로 달려갔어’ ‘그녀는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어’ 이념과 근대화에 희생 된 언니와 누나들인가. 대머리의 ‘뻔뻔스런 녀석’, ‘식탁 위의 조간신문’은 토악질을 하고 있는 남자를 그렸다. 신사도 여자도 아이도 ‘최루탄’ 세례로 눈물을 흘린다. 우울과 갈증을 담배 연기로 날리며 80년대가 저문다. 여기까지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대를 살아낸 이심전심이다.
80년대 말부터 카페 연작이 시작된다. 카페 안에 비행기가 날고 빨간 자동차가 맴돌며 담배연기는 힘차고 무궁하다. 자주 등장하는 담배연기 때문에 애연가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한다. 싱겁게도 다만 연기가 재미있단다.
세상의 단면으로 가져온 카페는 한정된 공간임을 거부한다. 삶의 희로애락, 오욕칠정이 소란스럽다. 갈증과 이상, 혁명과 수난이 이곳에서 일어난다. 포식을 하고 수난을 거쳐 통일을 꿈꾸는 곳도 카페다. 굿, 지옥, 12지 카페를 지나 드디어 ‘빈 카페’에서 애통하지 않은 슬픔을 읽으며 나는 자유와 풍만을 느낀다.
1993년 선인장 앞에서 맨몸을 드러낸 ‘자화상’은 왠지 위태롭다. 굳게 다문 입매, 옆으로 향한 눈빛, 살짝 찡그린 미간은 뭔가 불만스럽다. 식물원 속에서조차 뜨겁지 못한 청춘에 대한 회한인가. 멀리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서울의 밤 불빛은 명랑한데 그는 황토 언덕에 홀로 앉아 있다. 그를 닮은 두루미인지 학인지 하얀 새가 같은 포즈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모든 숨탄것들의 외로움이 절절하다.
‘춘몽’, ‘춘’, ‘춘’, ‘춘’은 에로틱한 여인 곁에 개구리가 하품하고 등을 돌리기도 한다. 봄春을 보는데도 봄밤이 달아오르지는 않는다. 내가 너무 건조한 건가. 연신 나를 돌아보게 한다.
‘신도시’,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등장한다. 개를 향해, 또 사람을 향해서 몽둥이가 치켜 올라가고, 주변사람들은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개가 사람을 무는 사고가 일어날 듯도 하고 사람이 개를 무는 사건이 전개될 듯도 하다. 감성 소비는 극으로 치달아 ‘이발소’는 만능 환락소가 되었다. 이렇게 그의 그림은 사회 현상을 기지와 냉소를 섞어 한껏 풍자해 불편하지만 다가가게 만든다.
지하철 연작은 단연 인간만물상이다. 빼곡한 사람 사이에 흰 토기, 검은 토끼, 고양이, 개도 한몫을 한다. 한결 밝아진 색상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이 바닥을 기고, 몽둥이를 들고 여자를 때리는, 또 몽둥이를 들고 남자를 때리는 진행형의 포스, 벌거벗은 남녀와 서성대는 사람들 무리 속에 사람은 모두 제각각이다.
2017년, 지하철은 지옥철이 된다. 만화를 좋아하던 작가는 말풍선으로 무거운 현실을 희석한다. 작품이 작가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온다.
2018년, <불안의 에티카>는 무채색 일변도다. 산 자와 죽은 자, 동물과 식물, 물고기까지 한데 어우러진다. 개구쟁이 악동 기질이 그림 구석구석에 숨어있다. 신화와 설화와 동화가 뒤엉켜 왁자지껄하다.
이흥덕 작가는 19세기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민중의 현실을 전한다. 40년을 지켜온 작가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 연신 웅성거리는 그의 그림들은 언뜻 보면 재미있으나 자세히 보면 무겁고도 슬프다. 정면 돌파가 아닌, 선동이 아닌 만화적 상상력으로 말한다. 다양한 모습으로 울컥울컥 쏟아놓은 말, 말들. 화판 위에 많은 이야기는 한 줄로 꿰어진다. 상처받은, 상처받고 있는 영혼들의 진혼곡 같다.
이는 민중미술가의 면모다. 역사를 이끈 주역이지만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억압되어온 피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훼손된 삶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정신 줄을 단단히 여민 오염되지 않은 이들이 민중이다. ‘사람 1천 명 중 7백 명은 속물이고, 나머지 299명은 이상주의자며, 단 한 명만이 리얼리스트’라는 버나드 쇼의 말이 떠오른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이성과 실천력을 가진 한 명인 리얼리스트와 민중은 같은 선상에 있다.
지난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작고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의 강한 생명력을 알게 되었다. 두께를 버린 유화는 힘을 빼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고수의 어법 같다. 쉽지 않은 색의 조화 - 밝은 노랑에 보라의 보색대비, 연두와 오로라 핑크, 한없이 가볍고 밝은 색감에도 들뜨지 않는 건 뭔가. 재밌게 눈길을 끌어당겨 기어이 마음을 열게 한다. 해찰하듯 만화적 익살을 입혀 불편한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작가는 최근에 다녀온 제백석과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를 소개했다. 같으면서 다른, 대가들의 거대한 예술세계에 대해 말할 때는 경외감이 스친다.
80년대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렸지만 미술 교사로 퇴직을 하고서야 전업 작가가 되었다. 생활인으로 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교사이던 시절이 아득한 옛날 같다. 그림값에 얽힌 이야기도 고전적이다. 웃으며 하는 말꼬리가 허탈하다. 극단적이지 않은 성격으로 가정생활도 원만해 보인다. 그러나 두꺼운 안경 너머 민중미술가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고수한 고집이 서려있다. 오랜 시간 사실주의를 형상화하여 작가 특유의 미학으로 펼친 내공이리다.
그림 말고 다른 일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단심丹心은 사람에 집중하는 힘이 있다. 사회적 이슈와 이상 현상을 보는 것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원론적 시선을 유지하려고 한다.
균형감을 가진 관찰자의 시선으로 안과 밖을 공정히 바라보며, 사회현상과 사람살이의 부대낌을 살뜰하게 살피고 새롭게 표현하며, 앞서 나아가는 각성자로 통찰에 이르러 민중의 소리를 드높일 것을 기대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 매산리에 서늘한 어둠이 내리고 있다.
성남문예비평지 <창> 9호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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