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노먼 베쑨> 가상인터뷰

칠부능선 2019. 3. 9. 19:49

노먼 베쑨을 만나다

- 가상인터뷰

노정숙

 

: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수필을 쓰는 노정숙입니다. 『닥터 노먼 베쑨』을 읽고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열렬하게 살다 가신 선생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지금 계신 곳은 어떠신지요.

노먼: 반가워요. 난 의사로 살다 1939년에 지구별을 떠났는데, 이곳도 아픈 사람 투성이네요. 바삐 사는 게 팔자인지 여기서도

     가만있으면 될 것을 저 아랫동네 환자들 아우성에 눈썹을 휘날리며 오가고 있네요.

노: 선생님께서는 전쟁터에서 ‘부상병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그들을 찾아가시오’라고 하셨지요.

    여전하시네요. 돌아가실 때도 더 많은 환자를 돕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잖아요. 선생님 출생과 가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노먼: 어릴 때는 호기심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지만, 철들고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대학을 다녔지요.

    어머니로부터 복음주의자적인 기질을 물려받았고, 목사였던 아버지에게는 행동파적 기질을 물려받았어요. 할아버지 이름도

    노먼 베쑨인데 유명한 외과의사였죠. 고향인 캐나다에 의학학교를 세웠지요. 할아버지는 부자보다 돈이 없는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셔서 부자들에게 원한을 사서 자주 이사를 했어요.

노: 좋은 인성을 물려받으셨네요. 본인의 성격은 어떤가요.

노먼: 생각과 동시에 몸이 나가는 ‘성질’이란 고질병이 있어요. 급한 성질 때문에 낭패 본 일이 많죠. 한 여자와 결혼을 두 번 하고

    이혼도 두 번 했지요. 첫 번 이혼은 내가 폐결핵에 걸려서 이혼을 결정했어요. 결핵요양원에서 당시 시험적이었던 수술을 하고

    완쾌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청혼을 하고 결혼을 했지요. 두 번째 이혼은 아내가 내 삶에 동참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희망을

    걸게 된 거죠. 아내는 나와 달리 몸을 던지는 모험을 싫어하네요. 여성들은 너무 오랫동안 신화 속에 갇혀있어요.

    자신이 스스로 인간적인 삶을 만들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아내의 요구대로 이혼은 했지만 내 사랑은 오직 그녀뿐입니다.

노: 그러게요. 요양원에 들어갈 때 성급하셨네요. 그 시절에는 폐결핵이 불치병이었지요.

    결핵요양원에서 잡지에 난 ‘기흉치료법’을 보면서 성공확신이 있었는지요. 또 수술에 성공하고 난 후 달라진 건 무엇인가요.

노먼: 확신이라뇨. 난 행동주의자에요. 모험에 성공한 거죠. 이때 내가 환자가 되면서 환자가 얼마나 배려 받지 못한 상태로 치료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난 환자를 단순한 유기체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하겠노라 다짐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사용했던 치료기구들을 환자의 입장에서 덜 아프도록 연구하고, 직접 만들기도 했죠. 그런데 결핵환자 하나를

    고쳐놓으면 가난이 환자 열을 만들더군요. 결핵이 가난에서 오는 병이라는 걸 알게 되고 사회현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지요.

    사회주의 나라에서 이미 실행하고 있는 의료보호 혜택이 필요하다는 걸 정부부서에 강력하게 외쳤지요.

    그래서 국민의료보험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어요.

노: 선생님은 파시즘과 나치즘에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 원조의료대로 활동하고 돌아와 다시 중일전쟁이 일고 있는 중국으로 갔지요.

    그곳에서도 전투지역에 더 가까이 가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는데 무엇이 그렇게 절박했나요.

노먼: 그건 자유에 대한 투쟁이죠.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스페인에서는 이동수혈차를 만들어 전장까지 갔었지요. 그건 지금도 유용하게 쓰고 있을 겁니다. 부상병을 치료할 때는

    시간이 매우 중요해요. 현장에서 치료하면 사상자를 75%까지 구할 수 있거든요.

노: 중국 전장에서 임시치료소로 쓰고 있는 절 마당에서 꽃을 보며 쓴 일기는 문학적 수사가 빛납니다.

    자화상을 비롯한 수술도구 그림도 예사롭지 않고요. 선생님은 예술가적 재능도 많으세요.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했는지 궁금합니다.

노먼: 아내의 도움으로 일찍 개업해서 돈도 많이 벌고 명성도 얻었지요. 사랑도 사치도 마음껏 해봤어요. 쾌락은 찰나죠.

    일과를 끝내고 고단한 몸으로 타자기 앞에 앉았을 때 행복했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화답하고 있는 그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이지요. 전쟁을 가까이 겪으며 폭격과 살인을 묘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지가 않았어요.

    오직 예술만이 죽음의 공포와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을 해방시키지요. 기질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내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어요. 예술가의 기능은 현상을 뛰어넘는 것이잖아요.

노: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의술도 예술의 경지로 느껴집니다. 후대를 사는 의사들에게 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먼: 의사는 고수입 장사꾼이 아닙니다. 돈을 못 낸다고 치료를 거부하는 행위는 없어야 해요. 우리 의사들은 수도승과 같아야 하죠.

    헐벗은 옷차림에 샌들을 신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수도승 같아야 한단 말이지요. 의사의 목적은 인체를 보호하고 소생시키는

    신성한 일이니까요. 전쟁터에서는 나 같은 의사를 기관단총처럼 써먹어야 하죠. 신성한 목적에 맞게 순간순간 치열해야 해요.

노: 의사의 소명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선생님처럼 자신의 몸은 안 돌보고 40시간을 쉬지 않고 71건의 수술을 하는 일은 심한 것 아닌가요.

 

    결국 피로 누적으로 치아가 나빠지고 빈혈이 오고 오른쪽 귀 청력을 잃고, 왼쪽 귀 청력도 나빠지지 않았나요.

 

노먼: 네, 맞아요. 내 돌직구 성질이 명을 재촉했죠. 그래서 나는 40대에 이미 70살 같은 몰골이 되었지요. 그렇잖아도 10월에는

   

    부족한 의료장비와 약품 조달을 위해 귀국하기로 했는데, 일본군이 갑자기 큰 규모로 공격을 해 오는 바람에 차마 떠나질 못했지요.

 

    전선에서 고무장갑도없이 부상병 수술을 하느라 손가락을 벤 것이 사달이었지요. 결국 패혈증으로 11월 13일 중국 전선에서 눈을 감았죠.

 

    49년 짧은 내 생을 이렇게 기억해주니 뿌듯합니다.

 

노: 선생님 생은 짧았지만 큰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선생님은 근대 중국 역사에서 칭송하는 세 인물 중 한 분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지린성에 ‘노먼 베쑨 의과대학’이 세워졌고, 스좌장에도 선생님 이름의 병원이 세 곳 있답니다.

 

    선생님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아 제2, 제3의 닥터 노먼 베쑨이 지구별 곳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앞선 생각과

 

    행동을 우러릅니다. 저도 제 ‘성질’을 잘 다스리며 눈길을 멀리 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필과비평> 209  / 201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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