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마리 개였다

 

나는 한 마리 개였다

노정숙

 

 

이탁오 선생님 인사드립니다.

‘나이 오십 전까지 앞에 있는 개가 자기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서 짖는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는 선생님 말씀은 머리에 쿵, 도끼를 맞은 듯했습니다. 육십을 넘기고도 내 색깔 없이 그런 개처럼 살고 있는 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선생님의 책들을 찾아봤습니다.

『분서1』은 선생님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답신과 잡술로 이루어졌습니다. 강학이 서신교류로 내밀하게 다져진 듯합니다. 상대의 사상을 칭찬하며 경계할 것을 짚어주고 나아갈 바를 이르는 말씀이 엄하면서도 따사롭습니다.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했고, 말단 관리 생활에서 뇌물이나 청탁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지요. 슬하에 7남매를 두었지만 딸 하나만 남았습니다. 더욱이 둘째 딸과 셋째 딸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비통을 겪으며, 식솔들의 호구를 위해 관직에 계셨습니다. 차근차근 오른 4품 지부 자리는 그야말로 편안한 앞날을 보장하는데, 54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빈천할지라도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무렵에 하신 ‘가난한 자가 천하게 살기는 쉬워도 부유한 자가 고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의미심장한 말씀을 새깁니다.

『분서Ⅱ 』는 책 앞 쪽에 주희와 도연명, 두 어른의 초상이 있습니다. 이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를 자유로운 사고를 옥죄는 교조주의로 변절되었다고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반면에 명리를 버리고 전원에 은거하는 삶을 노래한 도연명을 칭송하시네요.

「골동품 앞에 앉은 미인」이란 제목의 풍속도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여인으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치장이 돋보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봉건적 가부장제도 아래서 한계를 뛰어넘는 여성을 찬양했습니다. 그 가운데 몇몇은 제자로 받아들여 그들과 더불어 도를 논하기도 하셨지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라서 선생님께서 곤욕을 치르셨지요. 선생님과 함께 시대를 앞서 가던 멋진 여성들을 기립니다.

명대 말기는 유불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삼교 사이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요. 선생님께서는 그 종지가 동일하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선생님 73세에 이탈리아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를 만나면서 중국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공자의 가르침이 서방 문화와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끼셨지요. 유가문화의 폐단을 비판하고 인간 중심의 지식과 실학을 펼쳤습니다. 독서와 견문으로 쌓은 지식과 선입견보다 맑고 깨끗한 아동의 마음을 높은 가치로 여긴, 동심설童心說을 설파하셨지요. 새로운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 말입니다.

『속 분서』에서는 선생님의 유서가 구체적이라서 시공을 초월하는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죽은 뒤에 성 밖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구덩이를 하나 파라, 두 자 다섯 치 길이로 파서 갈대 자리 다섯 장을 펼쳐라. … 아직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때는 내 체백을 잠시 널 위에 놓아두거라. 입던 옷을 그대로 모셔둬야지 새 옷 따위로 갈아입혀 내 체백을 불안하게 만들면 아니 되느니, 다만 얼굴에는 가리게 한 장을 씌우고 머리는 늘 하던 대로 베개를 받치거라. … 내가 그곳에서 마음이 편하면 그곳이 낙토樂土가 된다. 너무 속된 티가 나지 않게 할 것이며, 남들의 말에 흔들려서 보기 좋게 하는 데 급급하여 나의 본심을 해치는 경우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어서 선생님은 비문과 무덤을 돌보는 일까지 세세히 남기셨습니다. 빌려온 널을 제자리에 갖다주라는 말씀을 읽으며 선생님의 완벽주의를 짐작했지요. 사후의 일을 그림 그리듯 이르신 선견지명이 놀라웠습니다.

『이탁오 평전』에는 선생님의 기백이 8대 조상으로부터 연유했음을 짐작하게 하고 76세, 옥중에서 자결로 생을 마치는 과정까지 세세히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황제부터 말단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부패하고 무능했는지, 그 지배사상이 얼마나 무기력하면서도 잔혹했는지 명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도 소개합니다.

자리를 바꾼 그 세상에서는 선생님 마음껏 새로운 사상을 펼치고 계시는지요. 이곳은 4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두 걸음 앞선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단’으로 몰린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스스로 이단을 즐기신 듯 여겨집니다. 62세에 처음 이단으로 몰리자 머리를 삭발하고 불교에 심취하셨지요. 최상의 법도는 인위적 조치가 없고, 최상의 통치는 소리가 없으며, 최상의 교육은 말이 없음을 신조로 삼으셨는데 그 이상理想은 지금도 이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은 말년에 병중에서도 ‘역인’ 수정 작업을 밤낮으로 하다 병세가 심해졌는데 “나는 ‘구정역인’만 완성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셨지요.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붓을 멈추는 일 없이 생을 마칠 때까지 엄청난 저작을 남겼습니다. 선생님의 선구적 사상을 바탕으로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맹렬하게 이루어진 셈입니다.

제가 읽은 선생님에 관한 몇 권의 책은 무기가 될 만한 두께이며, 400여 년 시차임에도 지금의 가치와 도덕에 걸맞습니다. 원문이 함께 있지만 저는 한문 지식이 짧아서 풀어놓은 글에만 열중했습니다. ‘내 책을 불태워라!’ 당당히 이르셨지만, 어느 곳에서도 태워버려야 할 불온한 기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오래오래 남아 후세의 정신을 일깨우리라는 역설이지요. 기존질서의 주를 이루던 공맹孔孟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맹을 가로 질며 노장老莊을 아우르는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느낀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말하는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탁오 선생님, 군주의 말이 곧 법이던 시대에 법률은 큰 틀만 마련하고 예제는 인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셨으니 그것이 이단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인정에 갈래가 많아 어지럽습니다. 두 걸음 빠른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헉헉대며 발맞추어 걷다보면 어느덧 어깨를 나란히 하겠지요. ‘이단’의 핍박을 의연히 받아넘긴 선생님의 배짱과 고집을 우러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삶이 개 같은 삶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아직 제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밀어주고 끌어 줄 가족과 스승 같은 친구가 있고, 친구 같은 스승도 있는데 자주 허허롭습니다. 일찍이 배고픔의 설움도 모르고, 밥벌이의 수모도 겪어보지 않아서인가요. 독서는 즐기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반론을 펴지 못하니 제 저작의 양식이 되지 못했나 봅니다. 이래저래 저는 머리 숙일 일만 남았습니다.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사배四拜를 올립니다.

 

<수필세계> 59, 2018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