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이 부른다
노정숙
두 달 후에 떠날 그리스 섬 자유여행 준비를 한다. 여유로운 시간에 크레타, 로도스 섬에 관한 책을 몇 권 샀다. 세면도구며 옷가지는 전날 작은 캐리어에 후르르 넣으면 된다.
준비1, 『로도스 공방전』시오노 나나미
로도스는 그리스 령의 동쪽 끝에 있는 섬으로 자유무역 도시로 번영했으며 로도스 시에는 아테나, 제우스, 아폴로 신전터와 극장, 경기장터 등 유적이 있다. 십자군시대에는 성 요한 기사단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시기가 배경인 『로도스 공방전』은 시오노 나나미의 개방적인 역사 해석과 소설적 상상력이 과하지 않아서 모든 장면들이 사실처럼 다가왔다.
전쟁을 배경으로 몇몇 멋진 남자가 등장한다. 그 중 으뜸이 오르시니다. 기사단의 대원칙인 ‘청빈, 복종, 순결’을 대놓고 위배하면서도 당당하게 살고 있다. 그를 벌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대 귀족 가문이기도 하지만 적과 싸울 때 용감무쌍하다는 거다. 오죽하면 적인 투르크인들이 ‘알라 신도 이 이교도만은 용서한다’고 믿을 지경이다. 전투의 막바지에 그는 전사한다. 그 다음날, 성채 밑 외벽 최전선에 기사 한 사람이 우뚝 서서 적군 앞에 나선다. 이 무모한 기사도 전사한다. 적군이 퇴각하고 난 뒤 투구를 벗기니 흑발의 여인이다. 그녀는 오르시니와 동거하고 있던 여자다.
투르크의 술탄, 스물여덟 살의 쉴레이만1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로도스 전쟁을 지휘하며 성 요한 기사단에게 항복하라, 투항하라며 계속 사신을 보내고 편지를 보낸다. 3천5백 명의 기사단은 6개월간 대항하다가 항복한다. 마지막 항복을 받아낸 후에는 휘하 병사들에게 ‘패자를 업신여기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한다. 이 지시는 완벽하게 지켜졌으며 항복한 기사 전원에게 귀한 선물을 주며 예우하고, 퇴각하는 배에 필요한 물건을 가득 실어가도록 배려한다. 항복한 기사단이나 승리한 술탄, 그들은 진정한 기사다.
전쟁은 인간을 단순화 시킨다. 성 요한 기사단 역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해적 행위를 정당화한다. 귀족집안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수도기사가 되어 바다 위에서 싸우다 스러져 간다. 종교는 지배욕과 물욕을 가리는 전쟁의 영원한 명분이 되어 인간의 이기심을 포장해 준다. 전쟁소설을 읽고 멋진 남자 몇과 로맨스만 남는다. 가까이 없는 멋진 남자들을 맘껏 흠모한다.
장미꽃이 피는 옛 섬, 완벽했다는 로도스의 성채를 그려본다.
준비2, 『섬』빅토리아 히슬롭
크레타 섬 북쪽에 있는 스피나롱가 섬을 배경으로 여자 4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도에 작은 점으로 표시되는 스피나롱가 섬은 1903년부터 1957년까지 실제 나병환자의 요양소였다. 플라카 마을에서 수영을 해서 건널 수 있는 거리의 유배지, 섬에 아내와 딸을 실어 보내야 했던 선량한 남자의 비통함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기적이며 욕망덩어리인 큰딸 안나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신분 상승을 한다. 이타심이 많은 작은 딸 마리아는 맑은 얼굴의 기품은 무르익고 늦게서야 빛이 난다. 인간이 제 얼굴을 만드는 과정, 사랑에 몸을 던지는 태도를 통해 그의 후반부 생이 짐작대로 이어진다. 인간은 타고난 천성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과 그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기 어렵다는 걸 새긴다.
이 소설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크레타 섬 점령과 레지스탕스 운동을 바탕으로 한 서사도 흥미롭다. 크레타 섬 사람들의 도전정신, 투쟁성, 자유혼을 높이 사며, 크레타 섬 출신 작가 카잔차키스에 대한 자부심도 내비친다.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가 잇대어있다. 무지의 시대에 빛이 되던 사람들이 있어 사회는 앞으로 나아간다.
천형의 섬이었던 스피나롱가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곳에서 치열하며 숭고한 삶을 살다간 여인의 숨결을 느껴보리라. 벌써 목울대가 아려온다.
준비3, 『최후의 유혹』니코스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는 이 책으로 인해 가톨릭에서 파문되고 책은 금서가 되었다. 붉은색이 그어졌던 책은 후세에 더욱 흥미를 끈다.
예수의 제자 중 저주받아 자살을 한 것으로 성경에 나오는 가롯 유다를 신념과 의지가 강한 사람으로, 예수는 우유부단한 미혹의 인간으로 그리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타, 두 아내를 거느린 인간 예수의 모습은 당시 신성 모독에 해당할 것이다.
예수가 행한 기적을 기록하는 마태오는 천사가 내려와 불러주면 그대로 받아쓴다. 성서가 기록되는 과정이 소설적이다. 카잔차키스는 하느님을 ‘구원하는 자’로 보는 맹목적인 믿음을 수정하고,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며 종교의 속성을 통찰한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유다에게 하는 말이 자신은 젊은이답게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섰고, 이교도들과 힘껏 싸웠으며 이성이 성숙했을 때, 일을 하고 땅을 갈고 우물을 파고 포도와 올리브를 심었으며, 여인의 육체를 품에 안고 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했다고 한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그려졌다.
800쪽에 이르는 두 권의 소설을 읽고도 미진해서 영화를 찾아서 봤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다. 영화까지 보고 나서 미진한 것은 풀렸는데 다시 의혹이 생겼다. 왜 이 소설로 작가가 파문까지 되어야 하는지….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고 믿음이라고 했지만, 회의나 의심을 거친 믿음이 더 굳건하지 않을까. 교리공부를 3수까지 하면서 세례를 받았지만 소원하게 지내는 나는 뭔가.
준비4,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을 그리스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크레타 사람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스 본토와 달리 크레타가 터키의 지배를 받을 때 태어났다. "한 번 부르면 가슴이 뛰고, 두 번 부르면 코끝이 뜨거워지는 이름, 기적이다. 내가 크레타 사람이라는 것은" 그는 이렇게 크레타를 영탄했다. 1957년 독일에서 죽은 그의 유해는 아테네로 돌아왔으나 그리스 정교회는 파문한 그에게 아테네 매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크레타 섬 이라클레온에 매장되었다. 그때의 이라클레온 공항이 지금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골을 남긴 조르바는 질그릇을 빚을 때 왼손 새끼손가락이 걸리적거려서 도끼로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결혼은 공식적으로 한 번 했고 비공식적으로는 3천 번쯤 될 거라고 한다. 두목이 읽는 많은 책을 향해 “불이나 싸질러 버리라”는 조르바, 무엇을 하건 화끈하게 해야 한다는 남자,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한다고 믿는다. 천하의 호색한 조르바는 수많은 여자를 탐하지만 여자도 같은 욕구를 가진 인간임을 인식하고, 여자의 기쁨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갈망을 일으키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실소를 지으면서도 귀를 세우게 된다. 그가 오래된 악기 산투리를 대하는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조르바가 시베리아에서 부친 편지에 ‘아직 살아있습니다. 오라지게 추워 할 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뒤집어 보면 사진이 있어서 두목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착하고 여자다운 물건입니다. 허리가 조금 뚱뚱한 건 지금 날 위해서 꼬마 조르바를 하나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조르바는 실존인물이다. 번역자 이윤기 선생에 의하면 1999년 2월 6일 카잔차키스 기념관에 갔을 때 한 달 전에 조르바의 딸이 그의 무덤을 참배하고 갔다고 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65세였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 편지에서 밝힌 꼬마 조르바일 것 같다.
2달 후, 자유혼 자체이면서도 자유를 부르짖던 그의 묘비 앞에 설 것이다. 이윤기 선생처럼 소주라도 한 잔 올릴까, 조르바의 딸처럼 꽃다발을 바칠까 궁리해본다. 포세이돈의 성지, 에게해를 배경으로 친구와 어깨를 걸고 산투리 리듬에 맞춰 조르바 댄스를 출 생각이다.
어느 소설가는 상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현장을 가보지 않고 소설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내 상상력의 빈곤을 알기에 현장에 가기 전에 그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전쟁과 질병, 모험이 지나간 흔적에서 옛 사람의 결을 살핀다. 하지만 그리스 역사의 기원은 신화神話다. 금기가 없는 신화의 섬이 부르니 벌써 가슴이 뛴다.
2018 <실험수필>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의 위로 (0) | 2018.07.10 |
---|---|
슬픈 축제 (0) | 2018.07.07 |
유쾌, 상쾌, 통쾌? (0) | 2018.04.24 |
이사 준비 외 1편 (0) | 2018.04.12 |
샘물이며 갈증 (0) | 2018.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