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수필 - 나의 수필창작법
샘물이며 갈증
노정숙
수필을 처음 대할 때 그는 내게 ‘샘물’이었다. 생각과 겪은 일을 누구에게 이르듯 맹렬하게 쏟아놓았다.
20년 가까이 쓰면서 책 네 권을 묶고 나니 수필은 내게 ‘갈증’이 되었다. 갈증은 두려움과 침잠의 욕구를 가져왔다.
더 진중하게 더 재미있게 써야한다는 강박이 왔다.
처음 쓴 나의 수필창작법은 「선 채로 꾸는 꿈」이다.
‘너무 높이 날면 거짓말이 된다.
너무 낮게 날면 세속적이 된다.
높이를 적당히 조절해야 격이 갖추어진다.’
말머리부터 사뭇 비장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수필 작법에 대한 생각은 그때와 변함이 없다.
너무 높이 날면 난해하고, 너무 낮게 날면 시시하다. 모든 문학을 시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시시한 것도 그렇지만 도무지 읽히지 않는 글이 될까 더 두렵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변방의 유인원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는가를 피력하며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신의 영역까지 넘보는 미래를 물음표로 끝낸다.
나는 얼른 지혜로운 인간을 포기하고 호모 루덴스, 노는 인간이 되기로 했다.
일거리가 있어도 친구가 부르면 재깍재깍 나간다. 긴장을 놓고 놀 때가 가장 즐겁다. 놀이에서 위로받고 놀이에서 힘을 얻는다.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공연을 보고 전시회에 다니는 게 다 놀이다. 놀이는 몰입이다. 놀이 자체가 문화다.
이제 글 쓰는 일도 노는 일에 편입을 시키기로 했다. 기왕 밥벌이가 되지 못하니 스스로 격상시킨다.
수필이 무형식이니 무구상無構想이니 하는 논란은 식상하다. 수준 미달의 수필이 수필인구가 많은 탓이라는 것도 진부하다.
수필이 문학이냐 비문학이냐는 논란도 어이없다. 돌아보면 가슴을 뻐근하게 하며 운치가 오래 남는 좋은 수필이 많다.
형식과 규제가 없기에 자유롭다. 파격적으로 새로워도 좋다. 어떠한 실험도 가능하다. 맘껏 놀기에 이보다 더 좋은 판이 어디 있겠나.
걸인과 상인, 노인과 거리의 주먹, 누구와도 친구가 되는 우정의 기술이 탁월한 연암을 내 놀이의 모범으로 삼는다.
친구들의 이야기소리를 들으며 맞은 그의 임종, 정신병원에서 외롭게 죽은 니체가 꿈꾸었던 죽음을 그는 조용히 실현했다.
어른들과 살다보니 죽음을 가까이 느낀다. 세상에 온 순서대로 가는 건 행운이다. 그러나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진 않았다.
준비하는 죽음, 기꺼운 죽음은 내 글의 주된 테마다. 기존의 통념을 깨고 가벼운 옷을 입혀 놀이에 끼워 넣는다.
병을 친구삼아 죽음과 손잡아야 한다는 걸 자주 일깨우려고 한다.
여행이 길이며 길이 삶이고 삶이 글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여행을 하며 이제 기록하지 않는다. 낯선 풍광을 즐기며 흘러가게 놔둔다.
이국의 역사와 인물을 배경으로 각별하게 떠오르는 한 장면, 한 순간을 잡고 시작한다. 역사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범위를 좁히고 상상력을 더한다. 사는 만큼 나오는 게 수필이다. 내 위치가 중심이든 변방이든 내가 우주다.
감상이 넘치면 난삽하다. 경험을 통과한 사유는 탄탄하다.
‘불혹, 최백호’ 콘서트에 갔다. 무대에 선 그는 노래한 지 40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맞을 40년은 노래를 더 잘 만들고, 잘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기름기 없는 가붓한 얼굴로 울혈을 내장 깊숙이 장전하여 천천히 쏟아낸다. 실팍한 울림, 목이 메는 위로다.
‘El Viaje여행’이란 제목의 플라맹고 공연을 보았다. 플라맹고는 외로운 춤이다. 아니 독립적인 춤인가, 구애의 몸짓인데 혼자 흠씬 빠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가 영혼의 울림으로 스민다. 열정 속에서 사색을 끌어내는 게 수필과 닮았다.
좋은 노래, 좋은 그림과 좋은 영화, 좋은 수필을 같은 저울에 둔다. 내가 살아보지 않았으나 내 것 같은 웃음과 눈물을 만난다.
이런 감동을 내 놀이의 상위에 있는 여행의 경험과 버무려 산뜻한 맛을 더하려고 궁리를 한다.
아무리 진솔한 삶이라도 문학적 수사 없이 수필은 완성되지 않는다. 사실의 나열만으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통한 진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나는 훈계보다 자조를 택한다. 사실을 두 다리로 든든히 받치고 양팔은 한껏 벌려 하늘을 향한다.
감정은 가슴을 거쳐 머리로 정리하고, 사건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풀어서 쓴다. 유머와 역설로 어우러지면 금상첨화다.
망치보다 강한 글이 있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은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를 어르고 달래며 뺨을 치는 형상이 통쾌함을 넘어 간담이 서늘하다.
회유와 위협이 절묘하다. 예전에는 이런 칼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넋이 빠졌을 황소를 헤아린다.
정권이 부패하고 농민을 착취하면 개혁을 주장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난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난이다. 개혁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그 정신은
축적된다. 황소의 난에서 동학 난을 떠올리며 무지했던 황소가 쓰지 못한 ‘황소의 읍소 혹은 변명’ 이런 답신을 생각해 본다.
머리를 쿵, 치는 책이 많은 건 행운이다. 두꺼운 책들을 의무감으로 읽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재미있는 책만 읽는다.
지독한 독서가들이 작가가 된다. 많이 읽다보면 문리文理가 터질까.
좋은 글에 대한 갈증이 끝나지 않은 걸 보면 이곳에서는 1만 시간의 법칙도 통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열렬하게 즐겁던 시간만 놀이에 올린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사실의 이면인 진실을 보려고 머리와 가슴을 연다.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를 가늠해 본다. 민감하게 깨어 있으려 노력한다.
신선한 시각, 새로운 정보에도 귀를 세운다. 쉽게 읽히도록 공력을 기울인다.
힘을 빼고 쓰라며 조언까지 하면서 정작 내 글이 말랑말랑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건 내 한계다.
쓰기에 요행은 없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또 고친다. 매듭 단계에서는 새뜻한 말을 찾기 위해서 사전을 뒤적인다. 다시 소리 내서 읽어본다.
눈에서 통과한 글이 귀에 걸리기도 한다. 쓰면 쓸수록 뒤통수가 따갑다.
너무 좋은 종이를 먹칠하고 싶지 않아서 글을 못 쓰겠다는 루쉰 같은 엄살도 통하지 않는 시대다. 두 번째 쓴 내 수필창작법이 결국 동어반복이 되었어도
강조법이라고 우기려 한다. 재미는 있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한편의 글을 여밀 때마다 나를 채근한다.
잠시 샘물이며 오래 갈증인 그대 곁에서 오늘도 논다. 친절하지 않게, 너무 냉정하지도 않게.
<수필미학>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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