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공장 공장장님께
유성애
귀하의 공장은 이번 장마에도 무고한가요?
오늘은 모처럼 햇볕이 쨍하길래 동네 서점에 갔어요
근엄한 자태의 스테디셀러를 지나
조금은 거만해 보이는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리다가
세 번째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노 시인과 마주쳤어요
신상에 열광하는 요즘 사람들이라지만
시인만은 묵은 골동품이 좋다는 건지
나 또한 꽤나 알려진 시인에게 먼저 눈이 가는데요
세계에서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
미개발 시인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인공화국에선
시의 주변을 잠깐 알짱거리기만 해도
시인 되고 싶으세요?
친절하게도 시인공장 공장장들께서 명함을 내미는데요
계절상품이나 기획상품은 그렇다 치고
유사품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말고
불량품은 리콜을 고려해보심이 어떨지요
덕분에 시인이 아니면 이 나라 국민이 아닌 날이 곧 올 거예요
하지만 크든 작든 시의 집을 지어야 진짜 시인
아무튼 나는 물어물어 진짜 시인들을 찾아 나섰는데요
출신 공장이 제각각인 시인들이 난민처럼 모인 구석에
보일락말락한 이름표를 달고
하나같이 머릴 조아린 모습이었는데요
그중엔 내가 존경하는 시인도 간혹 눈에 띄는데요
오래된 감동에 물린 나는
사려고 했던 시집은 까맣게 잊고
풋내 나는 시인들의 새파란 문장에 흠뻑 젖어보는데요
오늘도 신제품 개발에 땀 흘리시는 공장장님!
녹슬고 먼지투성이 저 기계부터
기름 치고 조이고 매만져야겠어요
지난여름엔 유독 장마가 길어
한강 물 불어나듯 시인도 넘쳐났었던가요
그나저나 여름이 채 물러가기도 전에
쏟아져 나온 가을 신상품들은 또 어디로 간다죠?
시집 『세상 모든 우산은 잃어버릴 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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