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수의 빈소에 빨간장미 한송이를 올리고 성호를 그었다.
마광수 교수와는 현대수필의 필진으로, 그림으로 인연이 오래되었다.
우리 편집회의 때 와서 밥도 여러번 같이 먹었지만, 저 사진처럼 활짝 웃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광마가 아닌 보통사람보다 더 유약한 느낌이었다.
2014년 5월, 산귀래문학상 시상식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봤다.
그때 이미 에너지가 끝난 사람처럼 행동했다. 병든 노모때문에 겨우 살고 있는 삶이라고...
어제 태백산에서 내려오면서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도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기어이 자신을 파괴했다. 그의 우울한 푸념이 쟁쟁하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288&NewsNumb=2017091288
오늘 선배님께 들은 이야기 하나,
1960년대 박승훈 교수가 처음 외설시비로 법정에 섰을때, 자신을 포함한 제자들이 우르르 갔다고 한다.
"문학작품에 대해서 니들 검사, 판사가 뭘 안다고 재판을 하냐" 며 호통을 치고 법정을 나갔다고 한다.
제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했다고 한다. 그 사건과 비교하면 마교수는 심약하다는 것이다.
박승훈 교수가 그때 중국집 2호실을 빌려 지금의 몰카 취재를 하던 이야기는 포복절도에 놀랍다.
후배의 이야기 하나,
<즐거운 사라>는 잘 못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잘 썼으면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문학적이든 비문학적이든
상상에서가 아닌, 몸으로 누리는 기쁜 세상에 입성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