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촌감단상 - 애통하지 않다

칠부능선 2016. 5. 7. 23:00

애통하지 않다

노정숙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사진 속 그의 눈은 여전히 선했다. 꽃무리 가운데에서도 활짝 웃지 못하고 있다. 직장 상사였던 그는 71세에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투병 중에 죽음을 준비해서인지 보내는 가족들 모습이 담담하다. 대가족의 장남으로 부모, 조부모까지 모시고 효를 다했다. 직장에서도 편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힘들게 일한 뒤 이른 퇴직을 했다. 강직하고 염치가 너무 많아서 안타까운 사람, 다시없는 선비지만 누군가에게는 무능해보이기도 했다. 이 세상 나들이가 그에게는 소풍이 아닌 노역이었으리라. 잘 자란 아들과 딸이 결혼을 했고 손자, 손녀도 봤으니 의무는 다한 셈이다. 이제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접어들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놀이는 서툴렀을 듯, 다음 생이 있다면 효자와 선비의 옷을 벗고 가볍고 즐겁게 사시기를. 두 번의 절을 하면서 속으로 빌었다.

 

이십여 년 전,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다 했으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오토바이를 타시던 아버님, 이제 90세가 되셨다. 사고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후, 식구들이 통사정을 해서 요즘은 자전거를 타신다. 신문 기사에 백세 이상 사는 분들의 특징이 아버님과 같다고 하니 환하게 웃으신다. 매일 오전과 오후에 자전거를 한 시간씩 타고, 6시, 12시, 6시 정확한 시간에 담백한 음식으로 소식小食을 하신다. 별미가 있어도 과식하는 법이 없다.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거실에 있는 실내자전거에 앉아 책을 읽으며 다리운동을 하신다. 아직 좋은 시력으로 텔레비전은 자막이 나오는 영화를 주로 보신다. 청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귀찮다고 보청기와 휴대폰을 거부하신다. 무심한 듯 세심한, 자기중심적이고 스트레스를 멀리하는 삶이다.

 

가정살림 말고는 취미생활이 없었던 어머니, 깔끔한 성격으로 집안을 쓸고 닦는 일이 주요 일과셨다. 80세까지 살림에 관여했지만, 목욕탕에서 두 번 쓰러진 후에는 아기가 되셨다. 만년에 운동은 침대 위에서 하는 맨손체조가 고작이었고, 89세에 거동이 불편해져서 요양원에 모셨다. 배려를 아는 어머니는 그곳도 친절하고 물리치료를 자주 받아서 좋다고 하신다. 맑은 얼굴로 ‘사도신경’을 나긋나긋 읊조리시면 죄민스럽다. 흰머리에 모자를 챙겨 쓰는 모습도, 자주 오지 말라는 말씀도 마음이 짠하다.

길건 짧건 할 일을 다 한 나머지 시간은 잉여 시간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만이 온전히 사는 시간이다. 너무 이른 죽음조차 애통하지 않은 건, 잉여 시간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호상好喪은 삶의 길이가 아니고 삶의 품위에 달려있다.

 

<수필과비평>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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