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질주하는 여름

칠부능선 2016. 5. 18. 19:47

 

노정숙의 <바람, 바람>

 

질주하는 여름

 

 

비꽃 든다.

여린 몸 낱낱이 힘 모아

한여름 열기를 삭이고 정결한 결기를 품었다.

씻어 내리는 건 비의 본성

감탕밭에서도 맑은 것을 온몸으로 자아올린다.

오늘 내린 비가 어제 것을 씻는다.

거친 대지에 흠뻑 스미고 넘쳐흐른다.

물의 힘은 흐름

흐르고 흘러 근원에 가 닿는다.

깊은 숨 몰아넣고 살과 뼈를 잇대어

처음 태어나는 것의 밑절미가 된다.

내딛는 걸음마다 기꺼운 탄성

비의 직립에 관여하는 건 오직 바람 뿐

 

 

                                                                                                                        Energy of sea - nymph 4 by JAIM

 

 

바람의 기분은 가늠할 수가 없어,

슬렁거리며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잇바디를 드러내 어느새 시퍼렇게 요동치며 밑바닥까지 뒤엎는다.

관념을 버리고 오래된 갈등과 사족을 버리라고 재촉하지 마라. 버리고 버리다 날개와 환상까지 버릴까 두렵다.

개성공단이 문 닫는 것을 보며 공든 탑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의 편력은 끝나지 않고 멀쩡한 얼굴로

다시 화해의 손을 흔드는데 돌아선 마음은 이내 풀리지 않는다.

 

 

모나고 해진 것들 어르고 달래며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간다.

다 받아주어 바다라는 종래의 어미 품으로, 모두 그곳에서 새로 태어난다.

어린 돌고래 한 마리 바다 속에서 사막을 그리워한다. 그 사막에서는 쌍봉낙타가 바다를 꿈꾼다.

등에 매단 물주머니를 버리고 싶어 긴 속눈썹이 자주 젖는다.

산과 산맥이 들과 벌판이 켜켜이 쌓여 한 세상을 이루고, 산호초 사이를 기웃거리는 물풀 하나 목에 건다.

물풀을 채찍삼아 바닷말을 달린다. 추추추 내달리며 파도를 탄다.

연습 없이 완성해야 하는 生, 자기 몫의 시간을 미련없이 질주해야 한다.

 

 

                                                                                                                               Energy of sea - nymph 3 by JAIM

 

 

          <현대수필> 2016, 여름호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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