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말, 말

칠부능선 2015. 1. 9. 19:43

말, 말

노정숙

 

 

인도영화 ‘지상의 별처럼’을 보았다. 난독증 소년의 성장통을 그린 영화였다.

눈 밝은 선생이 있어 소년은 고통에서 헤어나 자신의 천재성을 알게 된다.

그 선생은 소년에게서 자신의 어린 날을 본다.

피식피식 웃다가 싸아 통증이 오다가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문 듯 화해진다.

인도영화 특유의 느닷없이 나오는 노래와 춤도 여전하지만 여기서는 걸리지 않는다. 언제나 주제를 콕 집어주는 친절도 변함없다.

선생이 아이 가족에게 한 말 중에 솔로몬 섬의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서는 숲을 개간해 농지를 만들 때, 큰 나무를 베지 않고 사람들이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나무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단다.

그러면 며칠 후 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고사해버린다고 한다. 저주를 받으면 나무조차 스스로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호기심 많은 아들에게 어떤 말을 했던가 돌아보며 가족은 눈물을 흘린다.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은 평범하지 않다. 세상사에 어눌하고 엉뚱하기도 하여 조롱받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획일적 교육과 굳어진 관습에 적응하기 힘들다. 이들의 숨은 능력과 이면을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특출한 능력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정약용의 ‘품석정’이 떠올랐다.

다산이 낙향하여 정자에서 한가롭게 친지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때,

한 사람이 누구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권세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분통터질 일이라며 한탄했다.

그러자 사람은 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벌주를 주라고 했다.

다른 이가 저 말은 짐도 지지 못하면서 꼴과 콩만 축낸다며 혀를 찼다.

이번에도 짐승에게도 품평을 해선 안 된다며 벌주를 주라고 했다.

다산은 세상의 모든 것을 품평함에 있어 비난을 하면 안 되고, 정자 가까이 있는 바위마저도 운치를 더 해준다고 칭찬만 해야 한다고 이른다.

언젠가 읽은 글에 농부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나무에게

 “나무요 나무요, 톱 들어가니더” 이렇게 고한 다음 머리를 조아리고 한참 있다가 나무를 벤다는 내용이 있었다.

말을 무기로 쓰는 것도 무기를 들이대면서도 예를 갖추는 것도 사람의 말로 가능하다.

전자파보다 강한 말, 말의 파장과 진동은 우주를 움직이는 기운이 있다.

사람은 물론 동물이나 식물, 숨탄것은 모두 혼이 있다. 비난하는 말에 죄다 상처를 입는다.

남에게 비난을 받으면 자기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당장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의연한 척 허세도 부리지만 가시 성한 말은 너나없이 가슴에 박힌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기는 하지만 흉터가 남는다.

그 흔적은 사람이나 세상에 대한 원망이나 불신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주견이 지나치게 뚜렷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아무도 비난을 원하지 않는다.

상대가 의견을 물어올 때 대답하는 것은 스승이고, 묻지 않을 때 충고하는 것은 푼수라고 한다.

나는 언제부턴가 푼수가 되었다. 내게 직접적인 해가 없어도 눈에 거슬리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입을 뗀다.

스스로 나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고부터다.

어떤 일을 함께 할 때, 내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인다는 후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뒤 재지 않는 속전속결의 내 취향 때문이다. 때론 너무 거친 내 말에 스스로 움찔할 때가 있다.

논리나 이치에 맞지 않으면서 어른이라고 어린 사람을 무시하거나 윽박지르는 것을 보며 얼마나 분개했던가.

어른의 시작이 숫자보다는 품성과 인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도 세월을 거꾸로 사는지 낯 붉힐 때가 잦아진다.

나이 들면서 둥글고 어진 말을 품어야 하는데 연륜이 벼슬인 양 목소리가 크다.

아직 푹 늙지도 않고 섣부른 어른 행세라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며, 가장 쉬운 일은 남의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쉽게 살아온 적도 없건만 애써 어려운 일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류時流를 따라 건정건정 건너왔다.

스펙타클한 사건은 없고 시시한 에피소드로만 이어졌다.

이런 내 이력에 맨정신으로 남에게 저주하는 말이나 흉잡는 평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뒤통수가 당기는 걸 보니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

사는 동안 상처를 주고 상처 받은 일을 생각하면 새삼스레 부끄럽다.

바닥을 드러냈으니 나는 벌주를 마셔야 할 것이다. 잔으로가 아니라 말로 마셔야 할 것 같다.

내 생의 봄날이 있었던가.

아니, 매일 매일을 만화방창이라고 우기며 ‘가을’까지 왔다.

머지않아 겨울이 당도할 것이다. 지난날의 모든 겉치레를 거두고 맨몸으로 칼바람 앞에 서야 하리라.

살아온 흔적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내가 남긴 말과 글에 무릎 꿇고 머리 숙이며, 내가 나에게 세뇌한다.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면 입을 닫아라.”

 

<에세이피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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