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하하하

칠부능선 2014. 5. 31. 21:14

 

노정숙의 <바람, 바람> 2

 

하하하

 

 

 

夏 폭염

 

낮에 온 소나기가 만든 물웅덩이에 하늘이 마실 왔다.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건 예고 없이 내리는 한줄금 소낙비 덕이다.

강렬한 햇볕에 곡식이 여물고 과실은 단맛을 키운다. 불로 무쇠를 단련하듯 불볕에 몸과 마음을 달군다. 햇볕의 폭격을 이겨낸 몸은 곡식이 여물듯 강건해지고, 열뜬 마음은 정렬을 가다듬는다.

수직으로 쏘아대는 햇살, 지중해처럼 뇌살적이지 않고 끈끈한 습기가 서려있다. 한번 얽히면 쉬이 떨치지 못하는 감정, 정이라며 눌어붙어 가붓하지 못하다. 그 검질긴 진득함에 어제의 상처를 잊고 속없이 용서하고 또 속으며 다시 사랑을 한다.

 

 

 

夏 장마

   

어쩌다 찾아와도 좋아요. 그대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넉넉해져요. 숨 막히는 불볕도 그대 생각하면 서늘한 기운을 품어요.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아픔도 그대 눈길 한 번이면 수그러들지요. 그대의 존재 자체로 충만한 기쁨, 아시죠.

바람에 더운 기운 몰려오던 어느 날부터 날마다 찾아오는 그대, 처음엔 환호하며 단박에 열락을 오갔지요. 밤드리 한낮까지 진진다리 휘감으며 요설을 풀었지요.

기약 없이 기다릴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숨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어요. 아랫도리가 젖을 때까지는 참았어요. 그러나 이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에요. 그대 부드러운 손길이 날카로운 대못이 되어 찌르고 있어요. 찢어진 상처에 곰팡꽃이 피었어요. 검죽죽한 곰팡꽃에 어쩌다 반짝 햇살이 닿아요. 환하게 피워보려 고개를 빼지만 슬몃 낯만 붉히고 마네요.

한낮에 자주 내린 어둠이 그대 목소리마저 지웠어요. 어쩌면 좋아요. 이젠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지루한 건 딱 질색이에요. 너무 순진한 건가요. 밀당을 모르는 그대, 차라리 폭염하고나 놀까 봐요.

 

   

 

下 하심

 

땡볕 아래서 만난 운문사 소나무.

그 험한 임진왜란을 살아 넘기고, 굴욕의 병자호란도 질끈 눈 감고 이겨냈네.

5백년 세월 내내 아래로 아래로만 숨기척하네. 층층사리 깃든 생채기 감싸 어르고 애린 한숨 받아내며 벌린 팔, 가지가지 쭉 뻗은 겨드랑 지주대로 받치고 있네. 저 기둥 거두면 땅이랑 만날 텐데.

지난 삼월 삼짇날엔 막걸리 열두 말을 마셨네. 그런 술기운 없이 이 청청 도량에서 어찌 버틸까. 진탕 마시고도 주정 한 번 못하는 저 어엿한 선비, 솔잎 사이로 내리는 햇살마저 벼리네.

왜란倭亂보다 호란胡亂보다 더 무서운 건 내란內亂. 앳된 비구니 들끓는 속 식히려 자꾸자꾸 그늘을 만드네. 처진 소나무의 마음은 깊고도 높은 하심下心.

하심을 품으면 노상 웃을 일이네. 하하하.

 

<현대수필> 201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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