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주연이

칠부능선 2014. 2. 12. 20:20

 

주연이

노정숙

 

 

그 아이는 얼굴이 하얗고 눈 아래 주근깨가 살짝 있어서 귀여웠다. 아래층에 살던 그 애는 아들과 같은 여덟 살이었다.

매일 아침 계단에서 아들을 기다려 손을 잡고 학교를 오갔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짓궂은 아이들이 막대기로 건드리며 ‘얼레리 꼴레리’라며 놀렸다고 한다.

“우리 크면 결혼할거다. 왜?”

그 애는 당차게 말했는데 아들인 친구가 가만히 있었다며 식식거렸다.

“아프지도 않은데 뭘….”

아들이 겨우 하는 말이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순둥이였다. 주연이는 아들의 첫 여자친구다.

함께 밥을 먹을 때는 아들 밥에 생선을 발라서 놓아주기도 했다.

언젠가 그 아이 입주위에 뾰로지가 났는데 학교에 다녀와서 하는 얘기가 선생님께서

“주연아, 0 연고를 바르면 빨리 낫는단다.” 고 했단다. 그래서

“네에 ” 했다고 한다. 그 아이 엄마가

“너 아침에 O 연고 바르고 갔잖니.”

“엄마, 선생님께서 나를 생각해서 하신 말씀인데 바르고 왔어요. 그러는 거 보다 네에, 하는 게 더 좋잖아요.”

그 아이 엄마와 나는 마주 보며 기막혀했다.

그 후 반장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반장 선거에 나간 주연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너 반장 떨어졌구나, 표정을 보니….”

“아니에요, 반장되었어요. 내가 기뻐하면 떨어진 친구가 얼마나 슬프겠어요.”

집안에 들어와서야 활짝 웃는 얼굴로 그날의 일을 전했다.

아이들이 모여 있을 때, 간식을 줘도 먼저 잡을 때가 없다. 친구들이 거의 다 고르고 나면 자기 것을 잡는다.

말없이 주위를 살피고 몸놀림도 조용조용하다. 없는 듯 구석에 있다가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나타난다.

하루는 우리집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불이 나면 무엇을 가지고 나갈거냐고 물은 적이 있다.

장난감, 먹을 거, 좋아하는 옷, 이런 대답이 나왔는데 그 아이는 제일 먼저 책을 챙겨갈 것이라고 했다.

그 아이에겐 책이 제일 좋은 장난감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아이들 초등학교 1학년 끝머리에 헤어졌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서 이사를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연이를 보면서 참 놀라울 때가 많았다. 나로 하여금 자세를 바로 잡게 하는 아이였다.

여덟 살 때의 모습이 이러한데 그 후엔 얼마나 더 속 깊은 모습을 보였을지 자주 즉흥적인 나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다.

아동심리학에 일곱 살 이전에 익혀야 하는 ‘인지조망능력’이라는 것이 있다. 이 시기에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심을

익히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는 습득 불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천성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수한 유전자 속에 명석한 머리와 강인한 체질에 우선하는 덕목으로 배려심이 들어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요즘 잘난 사람이 너무 많다. 남의 생각이나 입장은 아랑곳 않고 자기주장만 한다. 소통 부재 앞에서 자주 슬퍼진다.

나는 아직, 나눔과 배려가 미래 세계의 경쟁력이라는 말에 희망을 건다. 타인에게 마음을 나누는 것이 배려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솜털 보송한 어린 여자아이가 보여준 그 행동들이 가끔 생각난다.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 주연이는 아들과 상관없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일하고 있다.

 

<수필과비평> 201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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