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숙의 <바람, 바람> 1
봄, 봄, 봄
봄, 꽃
언덕배기에 산수유 선웃음을 날린다.
제비꽃 살풋 고개 숙이고 쑥은 쑥쑥 올라와 푸르른 향내로 길손의 손길을 맞으리.
길가에 넌출넌출 수양버들 팔 벌리니 흰머리 휘파람새 그 품에 집을 짓고. 벌판은 꽉 짜인 풍경화.
실바람에 꽃비가 내린다. 좁은 길 굽은 길 연분홍 점묘화가 지천이다. 벚꽃이 진다고 애달플 건 없네.
봄볕은 벚나무 아래 곳간을 열어 이팝꽃 팡팡 나누네.
이팝꽃 곁에는 철쭉이 오동통 꽃망울 앙다물고 머지않아 여민 가슴 열어보이리.
꽃비, 걱정 없다.
벚꽃은 바람에 휘날릴 때가 절정인걸. 절정에서 스러지는 저 눈부신 산화, 달콤한 봄날이다.
봄, 창
봄이 되면 시작하는 일이 창문 닦기다.
창문은 집의 의식이며 양심이라서 맑게 해야 한다지만, 늘 흐리게 살다가 봄 기척을 좀 더 잘 느껴 보려고 벌이는 짓이다.
손닿는 부분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눠지는 경계 앞에서 멈칫한다.
안과 밖의 눈길에 대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부딪침에 대해. 해야 할 일과 원하는 것들의 힘겨루기에 대해….
궁리 많은 머리보다 착한 손, 재게 놀리는 손앞에 희뿌연 하던 창이 말갛게 고개를 내민다.
창을 닦고 나면 가슴에 산들바람이 깃든다. 안과 밖이 한통이니 머리까지 가붓하다.
닦는修鍊 건 가슴에 수련垂憐을 품는 일,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모두가 어여쁘다.
하늘은 자주 웃고 꽃들은 흥에 취하고 바람은 푸르싱싱하다.
저 찬란한 봄에 성장이 멈춘다는 에테르나 크로르포름을 뿌려볼까.
<수련(垂憐) 가련히 여겨 돌봄>
봄, 산
앞 산, 키 큰 소나무가 적당히 옆으로 퍼져 새들을 부르고,
단풍나무가 아직 마른 잎을 떨치지 못하는 사이,
눈치 빠른 놈은 뾰족 아기새부리 같은 잎을 내밀었다.
허리께서 나긋나긋 진달래 속삭이고, 희고 붉은 철쭉들 수다 질펀하다.
먼데 산 바라보면 여리여리 연둣빛 잔치 한창이다.
진진 초록으로 건너가기 전 말랑말랑한 생명의 시작, 만만 봄이다.
봄산에 들바람이 불면 머리에 꽃 꽂고 싶어지는 날 많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일순 깜깜해지는 모니터처럼
한참 얘기 중에 뚝 끊어지는 수화기마냥 그가 등을 돌린 것도 삽시간.
꽃보라 휘날리는 것도 잠깐, 목련이 환한 것도 한 순간.
쟁쟁 햇살이 애먼 눈 흘기니 겨우 버티고 선 무릎이 꺾인다.
꽃이 져야 잎이 돋듯, 어제의 그를 보내야 내일이 온다.
가기위해 오는 봄. 가거라 그대.
- 현대수필 2014.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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