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론(論)
노정숙
벌써 몇 번째인가. 세탁기에 물이 받치지 않고 흘러내린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하니 기사가 냉큼 달려왔다. 세탁기를 들어 올리더니 오십 원짜리 하나, 백 원짜리 둘, 녹슨 동전을 꺼냈다. 덜렁이 주인 때문에 세탁기가 수난이다. 세탁기가 그래도 돌아가는 것이 기특하다. 부엌을 돌아보니 모두 고물이다. 냉장고도 가스레인지도 20년이 되어간다. 청소기는 멀쩡한데 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작년에 딸이 바꿔 놨다. 청소할 때 시끄러운 게 뭔 대수라고. 산뜻한 살림살이가 기분을 좋게 만들기는 한다. 새파란 주부의 살림살이도 주인과 함께 늙어 갈 것이다. 그런데 자꾸 새것으로 바꾸면 어찌 묵은 정이 들겠는가.
정수기는 고장이 나서 바꿨다. 그러고 보면 성능이나 디자인이 뒤처진다고 바꿔본 것이 없다. 한 번 인연 맺으면 좀처럼 내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인가. 집안을 돌아보니 물건마다 쌈박한 건 없고 고운 손때가 묻어 있어, 적당히 낡은 내 모습을 보는 듯 임의롭다.
요즘 무릎이 비상이다. 노상 아픈 게 아니라 느닷없이 게릴라처럼 악, 소리 나게 아프다. 얼마 전엔 깔끔쟁이 친구 둘이 무릎 연골수술을 했다. 너무 많이 써서 그렇게 되었단다. 용량보다 많이 쓰면 마모가 빨리 오는가 보다. 반세기 넘게 부린 몸이 어찌 고장이 안 나겠는가. 새것으로 확 바꿀 수도 없고 다독이며 비위를 맞춰가며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속은 더욱 가관일 게다. 그곳도 분명히 내 책상처럼 정신없이 어질러져 있을 것이다. 뭔가 가득 차 있지만 기분 좋은 포만감은 아니다. 몸이 어둔하면 머리라도 세상 속도에 맞춰야 하는데, 이젠 아예 뒷북 전담이다. 유머조차 한발 늦어 주위 사람들을 웃게 하니 어찌 보면 내 유일한 선행이기도 하다.
요즘 대책 없이 느는 게 배짱이다. 내 뜻과 맞지 않으면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버럭, 목소리가 높아지니 어이없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도 계산에 어두운 게 자랑인 양 비교 분석도 없이 속전속결이다. 손익을 따지기보다 감정에 휩쓸리는 일이 많다.
내 몸과 정신의 부실함에 병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속셈이 있다. 노년의 희망 사항이 ‘말랑말랑한 노인’이었는데 설미지근한 꼴을 못 견디니 만만한 목표가 아니다. 연식이 더 할수록 입은 닫고 귀를 열어놓으라는데 눈총받이 고집쟁이가 될까 두렵다.
고물에도 등급이 있다. 폐품으로도 안 받는 고물이 있는가 하면 재활용으로 인기 있는 고물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연륜에 상관없이 정신 줄을 놓은 가욋사람이 있고, 연륜에 맞게 책임감 있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물이 고물高物도 될 수 있다.
어엿하게 늙어가는 어른을 가끔 만난다. 이 어른들은 겸손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폐경기 이후 여성의 몸이 비로소 신을 영접하며, 지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시기라는 설을 믿게 한다. 휘번들거리지 않으면서 그윽한 향취가 있다. 여유로운 인품에 절로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물건으로 말하면 오래 간직할수록 값이 올라가는 골동품과 같다.
집안을 둘러봐도 골동품 될 만한 게 없다. 누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번듯한 인물 또한 찾을 수가 없다. 이제 와서 조상을 탓해야 하나. 아니 자식에게 원망을 들어야 하는지 걱정스럽다. 본보기 삼아 사회에 환원할 무엇도 없고, 자식에게 본때 있게 물려줄 게 없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들인 공과 수련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 그 등급은 타고난 DNA와 환경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부익부빈익빈은 경제뿐 아니라 지혜와 자세까지 세습된다. 새롭게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없다. 다만 타고난 대로, 살던 대로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욕심이라고는 나 자신을 들볶는 것이 고작이니 그로 인해 생긴 책이 있기는 하다. 혹여 그 애물단지가 귀품이 될지도 모른다. 올해부터 저작권이 사후 70년까지 유효하다니 사후에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야무진 꿈을 꾼다. 꿈이란 클수록 좋은 것, 남들이 혀를 찬다 해도 그만이다. 망신살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을 이리도 부풀리는, 고물이 품은 꿈으로 가상하지 않은가.
귀물이 되지 못한 고물끼리 눈 맞추며 수럭수럭 산다.
<수필과 비평> 201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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