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봄날, 독백 / 평

칠부능선 2013. 5. 24. 10:31

                          봄날 독백

 

                                                                                               노정숙

 

1.

아빠가

똥을

피하여 가는 것은

무서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해도

 

막내는

자꾸

똥을 치우고 가자고

조른다

- 배상환의 <똥> 전문

 

 

  읽으며 씨익 웃었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렇듯 자기합리화에 능해지고 게을러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서 시외삼촌이 오셨다. 어머니의 막내 동생이다. 눈 밑 주름 수술을 해야 하는데 좋은 병원을 소개해 달란다. 그리고 수술 후 우리집에 와서 어른들과 함께 회복기를 지내시겠다고 한다. 위험한 수술이 아니니 아무 병원이나 가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냥 웃었다.

한참 있다가 수술하고 반창고 붙인 상태로 우리 집에 오셨다. 내가 오라고 안 해서 다른 형제네 집 가까운 곳에서 수술을 했다고.

좀 찔린다. 예전엔 내가 좀 더 착했던 것 같은데. 힘들고 불편한 걸 많이 감수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2.

취해서 비틀거리며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는데 개 한 마리가 짖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때 내 혼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3m 정도 저 앞에 떨어진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개가 왼쪽 다리를 무는 것을 보았다. 재미있게 느껴져서 내 몸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파? 아파?"

- 자핑아오의 <술 마시는 사람> 중에서

 

 

어느 정도 취해야 이런 경지(?)까지 가는 걸까. 이건 흔히 겪는 필름이 끊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유체이탈의 수준이다. 자신의 혼이 빠져나가 허우적대는 육신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가끔 흠뻑 취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 술자리에 가면 취기에 빠지기 전에 배가 불러서 더 이상 못 마셨다. 사실 어느 정도가 되면 몸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밀어내는 느낌이 온다. 이것이 문제다. 그리고 보면 술보다 다른 것으로 취하는 게 빠를 것 같기도 하다.

'중국문단의 고독한 협객'이라는 자핑아오의 수필을 읽다보면 전통적 관점을 고수하면서 사회와 인생을 독특하게 고찰하는 새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솔직하고 조용한.

밖엔 꽃 잔치 흐드러졌건 말건, 자핑아오에 취해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온다.

 

 

3.

암의 희생자들은 자동차의 저속기어 같은 사람들,

즉 좀처럼 감정을 분출하지 않아 고통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격리감을 갖고 있다.

암은 은유로서도 내면의 야만성이었다.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중에서

 

 

  “화 내, 엄마한테 막 화 내.”

아들한테 가끔 하던 말이다. 서른 해 살면서 녀석이 화내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부르르 화를 잘 내는 아빠,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벌컥, 소리부터 지르는 나 때문에 주눅이 들었나.

나는 이런 책을 읽기 전부터도 화는 참으면 병이 된다고 생각했다. 생전에 우리 엄마의 부처님 같은 처사가 아무래도 미심쩍은 때가 많았다. 꼭 화를 내야하는 대목에서도 엄마는 늘 씨익 헛웃음을 지으며 상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무슨 사람이 그래, 그냥 사람다워야지. 엄마, 정말로 화가 안나? 이렇게 물은 적이 많으니까. 돌아가실 때조차도 남들 배려하느라 앓지도 못하고 가셨잖은가. 그러나 엄마는 암으로 세상을 뜨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외할머니의 DNA가 격세유전 되었나보다. 아들이 '점잖은' 것보다 그냥 '젊게' 살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어머니가 보고 온 아들 사주에 '착함'이라고 달고 나왔다는 말도 싫다. 겸손을 알지만, 화를 내야 할 때는 단호하게 화낼 줄 알고. 조금 더 영악하고, 조금은 가볍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에고, 이러다 지난주에 생일을 안 챙겨줬다고 화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아이들 생일은 아이 낳느라 고생한 엄마를 챙겨줘야 한다고 세뇌시켜 놓긴 했다.

 

- <에세이 포레> 2013. 여름호

 

 

 

 

<계간평>

 

타자 - 되기와 우리- 되기

 인문주의와 타자의식의 진정한 주체들

 

- 권대근

 

  인간은 주체로서 존재한다. 단순한 개체로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생명체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개체이자 주체이지만,  전자의 두 층위가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지막 층위만이 고유하고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뇌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해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천박한 경향은 다양한 학문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진정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과과학의 성과로 조악하게 일반화한다는 측면에서 문제적 시도라 하겠다. 주체의 이해는 무엇보다도 이를 고유한 줕체로 만들어 주는 어떤 문턱, 즉 기호, 의미, 상징계, 사회, 문화의 문턱을 넘어서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름 - 자리라는 술어적 주체가 진정한 주체가 되기에는 주체성을 결하다는 점을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주체는 인문주의와 타자의식으로 정립된다는 것을 이 글에서 논증하려 한다.

  수필 속에 나타난 화자들의 삶은 개별화된 개체들의 삶이 아니라 내면화된 주체들의 삶이다. 그리고 주체란 사회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름 - 자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성립한다. 그리고 이름 - 자리란 바로 한 인간에게 붙어 있는 술어들이 함축하는 실제 관계들, 상황들로 구성된다. 사회란 이름 - 자리들의 집합론적 구조로 되어 있다. 사회에서는 숱한 변동들이 생겨나지만, 이름 -자리의 체계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집합론적 이합집산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체계를 바꾸어 나가야 할 사람들이 지식인이다. 수필가들은 모두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지금까지 중심이었던 것을 해체해서 중심이 아니었던 것을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계의 구축은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 - 되기, 숱한 우리 - 되기를 통해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학적 행위가 되기도 한다.

 

  노정숙의 <봄날 독백>은 수필 형식의 외연 확대와 다양성 추구라는 측면에서 그 가치가 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2,3,의 기호로 각기 다른 내용을 나눈 시도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수필은 다초점보다 단초점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름 - 자리의 체계라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게 하려는 다양한 저항 주체들이 개입하는 수필이라는 점에서 노정숙의 글은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이 수필에 나타나는 저항 주체들은 상승변증법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저항 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기 때문에 진정한 '우리- 되기'가 성립된다고 하겠다.

  인용 예문으로 도입된 배상환의 시 <똥>에서 아이는 '아빠가 똥을 피하여 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해도 자꾸 똥을 치우고 가자고 조른다' 이것은 침묵을 넘어서는 적극적 참여 의지이요, 개혁 의지인 것이다.

  우리의 주체는 우선 이름 - 자리, 정확히 말하면 이름 - 자리로부터의 탈주이다. 물론 이때 탈주는 벗어남이 아니라 바꾸어나감이다. 이 수필은 이름 - 자리라는 체계와의 투쟁이 막내와 작가를 일정한 주체로 만들어 주고 또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철학적이다. 권력을 가진 아빠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막내가 자꾸 치우고 가자고 조르는 행위는 억압과 순치의 메카니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정하의 태도다. 지금까지의 습관, 타인의 진로 따위는 배려하지 않는, 내만 치해가면 된다는 기성세대의 나태한 이기적인 모습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아이의 조름은 영토성에 대한 내재적 탈주이고, 이름 - 자리의 체계에 대한 정항이며 투쟁을 의미한다. 이 인용문의 문학적 완성이 요구하는 구체성을 통한 보편성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도입이라고  하겠다.

  작가의 억업에 대한 저항도 만만찮다. 미국에서 시외삼촌이 수술하러 한국에 와서 수술을 하고 작가의 집에서 머물고 싶다는 뜻을 통보받았지만, 작가는 '위험한 수술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병원에 가도 된다'고 하고 그냥 웃어버린다. 그리고는 "좀 찔린다. 예전엔 내가 좀더 착했던 것 같은데, 힘들고 불편한 걸 많이 감수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로 일관한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작가가 예전에는 힘들고 불편한 걸 많이 감수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권력의 체계에 작가가 억압당할 수밖에 없었던 비주체의 순치 시스템의 작동 때문이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메카니즘의 억업 - 순치 시스템의 작동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인 탈영토화를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에 '에라 모르겠다'는 진술을 통해 진정한 주체로서의 단독성을 확보한다.

  두 번째 삽화에서 작가는 중국문단의 고독한 협객이라는 자핑아오의 수필을 읽으며, 인생을 독톡하게 고찰하는 새로운 그이 시선에 취해서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는 주체로 등장한다. 자핑아오의 수필 <술 마시는 사람>을 읽으며, 자핑아오에 취한다는 은유적인 발상이 수필에 멋을 더한다. 세 번째는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인용 예문으로 삼아, 현대 사회의 오이디푸스 콤플랙스에 저항하는 평상시 태도를 전해준다. 아들이 점잖은 것보다, 젊게를 추구하였으면 하고, 아들의 착하다라는 사주에 거부감을 드러냄으로써 작가는 기존의 사회적 가치에 저항하지만, 결국 그녀는 삶 속에서 영토화된어 있음을 고백하고 만다. 진정한 의미에서 타자 - 되기, 우리 - 되기는 요원하다는 메시지 전달로 우리 사회의 억압 기제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노정숙의 <봄날 독백>이란 수필은 교육 - 지식보다 교정 -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 위해 자신을 수정해 가는 실천이 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한 과정이고, 그것이 타자 - 되기와 우리 - 되기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아들한테, "화 내, 엄마한테 막 화 내."라고 말한다.

  이 수필의 매력은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인정하는 해체적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중심주의에 지배되지 않으려는 작가는 이 수필에서 중심으로 여겨지던 자본을 협소한 가치로 내려놓음으로써 지식인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연이  (0) 2014.02.12
고물론(論)   (0) 2013.07.19
복권 당첨  (0) 2013.01.17
못난이 백서  (0) 2012.12.27
나를 받아주세요  (0) 201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