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당첨
노정숙
나가서도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무슨 말씀이건 떨어지기 무섭게 즉각 처리하는 내 성질에 단 몇 시간이라도 미룬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깨작지근한 걸 오래 지니지 못하는 못된 성미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상기된 얼굴로 말씀하셨다. 오늘 복권을 사야겠다고, 그것도 직접 가서 사시겠단다.
요 몇 년 동안 바깥출입이라고는 병원 가는 일뿐인데 당황했다. 오늘은 일찍 나가야 하는 날이라서 살짝 짜증도 났다.
일이 끝나고 늘 들르던 2차는 미루고 부랴부랴 일어섰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복권 파는 곳을 찾아보니,
예전에 어머니가 다니던 복권 파는 집이 없어졌다. 가까운 곳에는 없고 전철역 쪽에 가야한다.
어차피 아기 걸음마를 하는 어머니와 차로 움직여야 하니 큰 문제는 아니다.
“귀찮다, 그만 둘란다. 돼지 네 마리를 봐서 그랬는데….”
그 사이 마음이 변하셨는지 안 나가신단다. 아침에 내가 한 말이 걸리신 건가.
“어머니, 복권 당첨된 사람 중에 행복한 사람이 없대요. 부모님이 재산 많이 남기고 간 집들은 거의 형제간에 소송하고 있잖아요.”
이런 싹수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언제나 돈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에게 찬물을 끼얹은 언사다.
부모 능력에 의지해서 고등룸펜이 된 사람이나 우애 좋던 형제들이 부모님 돌아가시고 유산 싸움하는 것을 자주 봐서인가.
지나치게 많은 돈은 불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내가 우습다. 유산이 없을 것에 대비해 미리 마음 단련을 하는 것인지.
지금까지 내가 안 해 본 일 중, 하나가 ‘복권’을 사는 일이다. 사실은 제비뽑기에 자신이 없어서 일찍이 포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소풍 가서 그렇게 많이 숨겨놓은 보물찾기 쪽지를 찾아본 기억이 없다. 친구들이 서너 개씩 찾을 때도 나는 늘 빈손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리숭했나 보다.
종류도 다양해진 복권의 막대한 수익금은 사회복지에 쓴다고 하지만, 왠지 나는 복권 사는 것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행위로 여겨졌다.
일확천금에서는 불온한 기미가 느껴진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나도 불온해졌다. 내가 땀 흘린 것보다 많은 것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에둘러 말하기보다 쉬이 직격탄을 날리는데도 주위에서 눈총 맞지 않는 것을 보면, 긴가민가하며 찍은 답이 모두 맞은 격이다.
요즘은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자체를 안쓰럽게 본다. 더욱이 그것을 큰일로 여기며 대단하다는 인사를 받을 때는 참으로 송구스럽다.
내가 사는 속을 들여다보면 혀를 찰 일이 수두룩하다.
아직 부모님 눈 밖에 크게 난 일은 없지만 어머니와 뜻 맞추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돈을 너무 귀하게 여겨서 쓰지 못하는 어머니와 돈은 먼저 쓰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내 생각에 거리가 있다.
내일 걱정은 자식에게 미루고 자신을 위해 후하게 쓰시라고 재촉한다. 어머니처럼 모으는 데 힘을 쓰지 않는 내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어머니가 복권을 사는 것은 이렇게 속없는 나를 염려해서 뭉칫돈을 만들어보시려는 심산이었을까.
건강하실 때는 가끔 혼자서 복권을 사시곤 했다. 꿈 이야기는 꽁꽁 감추셨지만 모두 불발로 끝났다.
설렁설렁 내 식대로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아직 반기를 드는 용감한 가족이 없으니 그대로 밀고 나간다.
단독주택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어머니가 거실에 걸고 싶어 하던 호랑이 그림을 어머니 방으로 밀어 넣었다.
풍수설에 큰 동물그림이 밖에 나와 있으면 기가 세서 좋지 않다고 전했다.
모던한 거실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내 느낌은 쏙 감춘 것을 보면 나도 제법 여물어졌다.
여든이 되도록 부엌살림을 주관하던 어머니가 손을 놓으셨다.
결벽증에 가깝게 까근하던 성격도 어둔해진 몸과 함께 노긋해졌다. 원래도 말수가 적었는데, 마음자리를 내려놓으신 듯 고요하다.
어머니는 나처럼 이래라 저래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나보다 상수시다.
밖으로 나돌던 내가 이제야 살림이라는 것을 다잡게 되었다. 어깨너머 보아온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살림살이도 재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문자에 코를 박고 있는 것보다 낫다. 투자한 시간에 비례해서 확실한 결과가 나온다.
어머니가 자주 쓰던 ‘맛대가리 없다’는 말을 요즘은 잊어버린 듯하다. 음식에도 후한 점수를 준다.
내 한량스런 자유가 줄었지만 살림 냄새 풍기는 맛도 괜찮다.
그러나 제 습성이 어디 가랴. 재충전 한답시고 호시탐탐 밖으로 튕겨 나갈 궁리를 한다. 나도 명분은 있다.
내가 여행을 하는 동안 동서나 며느리에게도 효도의 기회를 주는 것이니 좋은 일이다.
이런 대책 없는 자뻑이나 막무가내형 긍정이 복권 당첨이 아닐까.
어머니가 목욕탕에서 두 번이나 쓰러지고도 일어나신 것은 분명히 복권 당첨이다.
매일 해와 달을 볼 수 있는 것도, 매일매일 내 손으로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행운이다.
허리띠 졸라매지 않고도 내 집에 사는 것은 주택복권 당첨이다.
서로 말을 알아듣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과의 인연은 로또 당첨이다.
일상에서 복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복된 마음은 완전 대박이다.
복권 사기를 포기한 어머니께
“어머니, 그 꿈으로 더 좋은 걸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어머니께 먹히지도 않을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뒤통수에 부딪히는 소리를 느낀다.
‘그래, 너 잘났다.’
<에세이스트>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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