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 박종인

칠부능선 2012. 10. 21. 22:32

미술관에서 애인을 삽니다

박종인


미술관이 하품할 때 나는 슬쩍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림이 열차처럼 한 량 열 량 늘어서 있습니다 증거물을 찾으려고 차창 안팎에 돋보기를 들이댑니다 나는 그림을 읽고

있습니다. 바퀴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마네의 요리<풀밭 위의 식사>가 도마 위에 오릅니다 오소소 닭살 돋은 닭다리를

집어 들자 두드러기가 일어납니다 내 안의 검문소가 철컥철컥 ‘여자는 느끼고 남자는 생각한다’라는 단서를 포착합니다

발가벗은 여인의 알리바이를 조사합니다 양복 입은 두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탕탕탕

열차를 뒤지다 명암을 요리한 화가들이 마술사로 변장하여 사기 치는 현장을 포박합니다 세상은 해학입니다 어둠과 음

침함, 밝음과 깔끔함,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교묘하게 채색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를 추가합니다

달리고 있는 열차 7호 칸에서 화가들의 죄목에 대해 조서를 꾸밉니다 고갱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

는가>를 절묘한 색채로 요리했다 변론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 항문으로 가는 중입니다 듣고 있던 싯다르타와 플라

톤과 막스가 판결을 내립니다. “당신은 유죄입니다” 탕탕탕

미술관에 갇힌 화가들은 색채로 마술을 부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도 죽지 않는 화가는 분명 마술의 대

가, 치러야할 형량이 늘어납니다 보시죠. 면회 오는 저 끊임없는 발길들을, 애인을 한 점 사서 드셔보시죠 열애의 맛이 기

가 막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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