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계의 현대시사
박현수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데도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궁색한 실록의 시절
뒤통수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검은 표지의 명부에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시선을 둘 데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내 어깨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시들만은 제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되리라
이 느닷없는 호출에도
그즈음 현대시사는 평온하기만 했고
검은 책 앞에서 고민하던 사가도 잊혀 갔지만
화양리에서 엮는 변두리 시사에는
계몽과 실험이
몸을 섞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늘 여자 반, 남자 반으로 이루어진
금기도 없고 계통도
묻지 않는 뜨거운 불륜도 거기 있었다
거기,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건성으로 읽던 현대시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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