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秋夕 / 고은

칠부능선 2006. 7. 23. 22:45

 

      秋夕 / 고은

 

 

  숙자는 추석 쇠러 대전 제집에 갔다.

  마른 고비나물 따위 마련해두고 간 안주로

  모인 친구들과 추석술 거나했다.

  장준하 상진들을 추념치 않을 수 없어

  친구 하나하나가 스스로 준하 되고 상진이 되었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아침 점심 찬밥 말아먹으며

  내 마음 물에 정들어 가득했다.

  닭 모이도 푸짐하게 주니 새삼 추석 같다.

  제놈들 서로 다투면서 바쁘게 쪼아댔다.

  예술은 신이고 예술가는 거지인가

  그렇다면 정치는 도둑질인가

  싸움으로 밥먹는 닭이나 사람이나 우리나라 사람이여

  저녁때는 마냥 선희가 학교 갔다 들러서

  밥지어 함께 먹고 가고

  나는 선희가 간 뒤 이것저것 특집프로 돌려보다가 만다.

  이렇게 지내다가 잠이나 자고 자다가 전화도 받고

  밤이 가서 아침이 되면 그 아침도 오랜 친구인가

  바라보면 마당의 후박나무 열매는 꼭 원숭이 똥구멍이건만

  햇빛에 밝아서 히이히이 웃는 것도 같다.

  잎새들은 바람맞이 재간도 없이

  멋쩍게 희살저으며 놀라며 흔들린다

  언제 내가 겨레를 위하여 산 일이 있었는가.

  마흔이 넘어 우는 아이 달랜 적 없이

  밤하늘 아래 겨레 앞에 빈 것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책 덮고 우거진 잔디밭 거늘다가

  과꽃 분꽃 따위 여름가을 꽃 앞에서

  나보고 꽃이 부끄러워하는 듯 나도 꽃에 부끄럽다.

  지난해 추석은 추석 쇠고 잡혀갔으나 이번은 그저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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