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천성 / 박경리

칠부능선 2021. 8. 10. 12:51

천성

박경리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검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실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말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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