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김민정

칠부능선 2019. 5. 10. 22:59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그 남자는 말했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시집<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2009년 '문학과 지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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