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숙의 <바람, 바람> 7
춤추는 가을
가을 들녘에 춤판이 벌어졌다.
고개 숙인 벼이삭 슬렁슬렁 블루스를, 탐스런 수크렁 멀리 가까이 오가며 왈츠 한창이다.
서걱서걱 수수밭 숨결마다 각 세우는 탱고며, 잘 여문 해바라기 늠실늠실 플라맹고까지.
흥대로 머리 맞대고 바람에 몸 맡겨 휘휘친친 군무 흐벅지네.
여태 덜 익어 고개 든 놈도 있네, 불쌍타 뻐센 것들. 힘 빼고 한바탕 흔들면 되는 것을.
Energy-2014 Dancing Meditation 6 - JAIM
공포가 창궐했다.
사람 모이는 곳이 헐렁하다. 국제전염병 ‘사스’도 우리는 신고 다니며 물리쳤다.
돌연한 죽음보다 무서운 건 생각 없이 오래 사는 것인데….
35분에 한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서 무서운 게 뭔가. 명命은 하늘에 있다는데
죽음의 공포恐怖 보다 위험한 삶의 공포空包.
담방담방 뒤꿈치에 힘을 넣고 오달지게 흔들어 보자.
허설쑤로 어림없다.
온 나라가 흔뎅거리니 어느 가락에 맞춰 춤을 추나. 슬금슬금 맞춘 발이 남의 발등 마구 밟네.
반 박자 늦는 건 웃음거리나 몇 박자 뒤진 건 한숨거리네. 두 발 쿵쿵 다지고 팔을 한껏 휘두르면
잡것 날것 다 달아날 터, 온몸이 흠씬 젖네.
오직 믿을 건 썩지 않는 내 땀이네.
Energy-2014 Dancing Meditation 9 - JAIM
<현대수필> 2015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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