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만에 떠난 안경
노 정 숙
안과에 갔다.
곱상하게 생긴 젊은 의사가 '중년안'이라며 말도 예쁘게 한다. 예전에는 노년층에게 나타나서 노안이라고 부르던 눈 노화 증상이 요즘은 30대 후반부터 온다고 해서 중년안, 원시안이라고 한단다. 게다가 들어본 적도 없는 '컴퓨터시력증후군'이라나,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를 많이 사용해서 생긴 신종병이라고 한다. 뭔 시류를 따른다고 신종병에 걸리나. 눈이 침침하고 안구 통증이 생기며 시력이 떨어진단다. 아직 통증까지는 안 왔지만 요즘 부쩍 침침해졌다. 신통한 치료방법이 없고 눈에 좋은 녹황색 채소를 많이 먹고 눈을 혹사시키지 말라고 한다. 다초점 안경을 쓰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책과 컴퓨터가 연인인양 종일 바라보며 빠져있다, 휴대폰은 아예 껌딱지처럼 붙이고 산다. 나이 들어 눈이 흐릿해지는 것은 문자에서 멀어지라는 뜻일 수도 있다. 눈이 어두워지면 마음과 달리 머리회전도 둔해지고 판단력도 떨어지는 것이 순리다. 그런데도 눈을 부릅뜨고 문자에 코를 박고 있으니 문제다. 쨍하고 산뜻한 문장 하나 건져 올리지 못하면서 애먼 눈만 혹사시키고 있다.
화면이 큰 겔럭시폰조차 안 보여서 다초점안경을 맞춘 것이 열흘 전이다. 점심을 먹다가 안경을 벗은 기억이 있는데 그 후 사라졌다. 와인색 뿔테가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어질머리 앓으며 아직 적응이 안 된 상태다. 이 안경은 도수를 아랫부분에 점진적으로 넣었기 때문에 눈동자의 위치를 잘 조절해야 한다. 글씨를 볼 때는 눈동자를 내리깔아야 한다. 고개까지 숙이면 돋보기가 기능을 못한다. 대신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는 고개를 완전히 숙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단이 갑자기 올라온 듯해서 발을 헛디딜 수도 있다.
일주일 정도 쓰고 생활하면 적응한다고 했지만 순발력 없는 내게는 어림없는 소리다. 낮은 코를 누르는 무게감과 귀 뒤에 매달려 있는 이물감 때문에 자꾸 안경을 벗어 놓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안경은 내 몸의 일부처럼 융합할 수 없는 물건이었나 보다. 정들기 전에 잃어버린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빨리 정붙이지 못한 것에 미안해해야 하는지….
초등학교 시절에 얼마나 동경하던 안경인가. 점심시간에 안경 쓴 친구가 세수하느라 벗어놓으면 얼른 써보곤 했다. 그 동그란 안경을 쓰고 바라본 운동장은 아지랑이가 아롱거렸다. 한참 쓰고 있으면 몽환 속으로 빠져드는 듯 아찔했다. 그러나 안경을 쓴 친구는 그때부터 세상을 또렷하게 봤는지, 하는 짓이 야무지고 공부도 잘 했다.
얼마 전부터 책 읽을 때 돋보기를 쓴다. 흐릿하던 문자가 선명하게 보이니 나도 잠깐 똘똘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다. 돋보기를 쓴 채로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초점을 잃고 두루뭉수리하다. 어릴 때 친구의 안경을 통해서 보던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 몽상에 빠져서 좋았던 풍경이 이제는 답답하게 다가온다.
나는 안경의 기능면이 아닌, 왠지 지적(知的)으로 보이는 모양새에 혹했는가 보다. 이목구비 뚜렷하게 잘 생긴 얼굴에 안경은 방해물이지만, 개성 없는 내 얼굴은 안경 덕을 보리라 생각했나 보다. 모양새에서 자유로워진 지금, 멋을 위해서 불편한 안경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눈이 지치기 전에 그 되잖은 지적호기심을 버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눈을 즐겁게 해줘야 했다. 칙칙한 컴퓨터 화면보다 푸른 산을 많이 보고, 시꺼먼 잔글씨보다 확 트인 하늘을 자주 봤어야 했다. 자주 마시는 커피나 술보다 눈에 좋다는 블루베리나 눈영양제를 챙겼어야 했다. 각성은 늘 뒤늦게 오는 법, 그것조차 금세 잊어버리니 대책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안경을 찾느라 허둥대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뻔했다. 안도의 숨을 쉬며 교통사고 난 것보다 안경 잃어버린 것이 낫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드러나지 않지만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실속 없이 분주한 날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둥둥 떠도는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계산속 어두운 건 난치병이다.
이제, 문자와 세상을 확실하게 분리해서 봐야한다. 문자세상은 돋보기를 통해서 보고, 문자 밖 세상은 오감을 통해서 몸으로 볼 것이다. 문자 밖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피와 땀, 눈물과 한숨이 필요할 것이다. 모자라는 눈치와 재치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못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눈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문자 안 세상과 문자 밖 세상이 다르다고 분기탱천하던 때가 그리울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다초점이란 내 생리에는 맞지 않는다. 초점을 여러 곳에 두는 게 내 깜냥에 가당한가. 한 가지에 초점 맞추기도 힘든 이 덜렁이가 다초점이라니, 과욕이다.
<월간문학>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