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술꾼, 글꾼

칠부능선 2011. 3. 9. 17:14

 

술꾼, 글꾼 

노정숙

 

 

  폭음을 했다. 몸이 한물 간 건지 전에 없이 한 순간에 확 가버렸다. 3차로 간 라이브 카페에서 옛날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로 돌아갔나 보다. 단발머리 시절에 문학의 밤에서 들었던 ‘Take me home country road’, 조금 더 커서 좋아했던 ‘님은 먼곳에’를 들으며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처음 마신 커티삭이라는 위스키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병에 그려진 범선을 보며 내 역마살이 도져서 더 들떴는지도 모른다. 초저녁부터 작정하고 마신 술이 알딸딸 기분 좋은 순간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 좋은 술을 마시고 왜 꺼내놓느냐고 했던 게 언제였던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울렁 파도를 타며 먹은 것을 마구마구 토했다. 그 순간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이런 책 제목이 떠올랐다.

  무장해제 할 수 있는 편한 사람들이 느는 것은 행운이다. 망가진 내 모습에 혀를 찼을지도 모르지만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혹은 아무리 마셔도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나에 대한 낭설은 끝났다. 다음날까지 흔적을 남긴 것은 처음이다. 종일 쩔쩔매는 내 꼴을 보며 남편이 실실 웃는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양조장이었다. 디귿자집의 바깥쪽은 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술통에서 살았지만 가족들이 술로 고생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시면 목소리가 커지고 괜스레 웃기도 했다. 평소에 근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호방한 모습을 보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애주는 현실도피의 혐의도 있지만, 술은 시를 낚는 바늘이요 근심을 쓸어내는 빗자루라는 읊조림에 귀를 세운다. 술도 음식이라며 할머니와 어머니도 한 잔씩 하셨고, 아버지와 오빠들은 말술이다. 나도 맥주 같이 순한 술은 아무리 마셔도 배만 부르지 취기가 오지 않는다. 참으로 비경제적인 술꾼 집안이다.

  술과 글은 마음을 푸는 도구다. 자신을 드러내는 적나라함 가운데서도 중심잡기가 필요하다. 삭히지 못하고 생으로 나올 때의 면구스러움이 같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술로 마음을 풀면 속을 헤집지만, 잘 삭힌 좋은 글은 자신은 물론이며 남의 상한 속까지 다스린다.

  내가 쓰는 글의 한계를 느끼는 요즈음이다. 촌철살인의 언어를 꿈꾸기는 가당찮고, 어질고 둥근 말을 버무리기는 아직 격을 갖추지 못했다. 여전히 들쑥날쑥 삐죽대는 감정 따라 흔들리고 있다.

  가끔씩 속내를 휘젓기는 어설픈 글보다 술이 만만하다. 깊이 고민해야 할 일에 부딪치면, 한 잔 마심으로써 쉽게 감정을 누그러뜨린다. 대책 없는 낙천과 무딤이 글을 쓰는 데 치명적 결점이다.

  주선 이태백은 달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슬프다고 한 잔, 구름에 가렸으니 오죽 답답할까 하면서 또 한 잔 했다지만, 풍류에 젖기엔 번다한 일상에 핑계도 많다. 다만 술 백 잔에 시 백 수를 건지는 주선의 경지를 우러른다.

  술자리에서 글이 안 된다며 평펑 우는 후배를 보니 왜 그리 예쁜지. 난 그런 순간에 어째서 뻔뻔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인지. 유년의 애틋한 기억도 없고, 허술한 가풍에 근골의 기품도 없는 탓인가. 골수의 뼈저림에 가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한심하다.

  술은 잊고 지내는 때가 많지만 글은 매일 잊지 않으니 자신이 글꾼이라는 박시인의 말에 희망을 품는다. 나 역시 술은 거의 잊고 지내지만 글은 항상 내 뒤통수에 매달고 있다. 흡족한 글 한 편 못썼지만 15년 넘게 글동네를 어정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십년쯤 지나면 그 분야에서 꾼이 되리라 생각했다. 돌아보니 안일한 생각이었다. 꾼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함이 문제였다. 글은 질투심 많은 연인과 같다. 몰두하여 바친 시간만큼만 야박한 눈길을 준다. 곡진한 마음이 아니면 희미한 미소도 어림없다. 불같은 사랑을 전력투구로 퍼부어야 했다. 언저리를 맴돌며 안타까운 몸짓만 보내는 건 소용없다.

  내 노력 없이 타고난 술꾼 기질 보다 내 힘으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글꾼 기질이 확실히 미숙하다. 폭음 후에 쓸 만한 글 한 편 건진다면 매일 밤 내 간(肝)을 혹사시켜도 좋겠다. 언젠가는 쌈박한 영감(靈感)님이 왕림하여 미지근한 나를 꼼짝 못하게 하지 않을까, 오늘도 줄기찬 짝사랑에 달뜬다.

  잔바람에도 속없이 빗장을 활짝 연다.

 

<에세이문학> 201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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