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침대
노정숙
아테네의 뒷골목이다.
아라베스크풍의 철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뒤통수를 당기는 한기를 느끼긴 했다. 요괴 문양이 쌍으로 새겨진 침대를 보면서 죽음의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그때 벽마다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나 보다. 비릿한 냄새와 음울한 기운으로 인해 온 몸에 소름이 돋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건장한 체격의 프로크루스테스를 어찌 당해내겠는가.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걸 잊었나. 짙은 눈썹에 우뚝한 코, 다정스러워 보이는 입매에 잠시 눈이 멀었나 보다. 순순히 끌려가 그의 침대에 누웠으니.
내 자라지 못한 키 때문에 침대의 아래 위가 한참 남았다. 얼른 위로 당겨 눕는다. 나를 침대에 맞게 잡아당길 때는 아랫도리만 잡아 당겨졌으면 좋겠다. 생각만 해도 허한 목에 찬바람이 지나간다. 괜찮아 괜찮아, 주문을 외지만 쿵쾅거리는 가슴은 터질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이 영영 이별의 순간이 된다 해도 그리 애통할 것은 없다. 아직 맑은 정신과 내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끝나는 것도 나쁘진 않다. 내 생에 더 이상 좋은 날을 바라는 건 과욕이다. 가당찮은 호기를 부려보지만 오금이 저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여행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상상을 해본다.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노상강도로 여행자를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랐다.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의 비유로 쓰인다. 훗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른 수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내 생각에 맞춰 상대가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하고 10년쯤 지나서야 알았다. 미욱하게도 내 가치가 상대와 같지 않다는 것도 그쯤에 터득했다.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나도 나만의 침대가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은밀히 사람을 재는 나만의 척도다.
돈이 최고라며 열심히 모아야한다는 어머니와 돈은 쓰기 위해 버는 것이라는 남편의 논쟁은 언제나 결론이 없다. 서로의 절대가치가 팽팽하다. 나는 어머니처럼 돈을 모으는 재미도 모르고, 남편처럼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보지도 못했다. 요즘은 모든 인사치레가 돈으로 해결되는 시대지만 내 절대가치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으면 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절대가치인 돈이 부와 동의어가 될 수 없음을 앨빈 토플러의《부의 미래》에서 읽었다. 부란 돈으로 살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갈망까지 해소시켜 준다. 모든 가능성의 축적물인 넓은 의미의 부를 위해 돈을 투자해야 한다. 아마도 남편이 주장하는 맥락이 그것이 아닐까. 돈에 대한 견해는 어머니 보다는 남편 쪽으로 기운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여행을 떠났다. 내가 쓴 여행비용으로 인해 마이너스통장의 잔고가 불어나도 남는 장사라고 계산한다. 여행은 보이지 않는 부를 쌓는 일이다. 내 보물창고에는 언제든 가슴 뛰게 하는 사람들과 낯선 풍물이 그득하다. 내가 쌓은 재산이 어머니처럼 돈이 아니라서 나를 위해서는 넉넉하지만, 남을 위해서 유용하지 못할까 걱정될 때는 있다.
능력과 재산은 나눌수록 불어난다. 칼칼한 성격 탓에 평교사만 하신 은사님, 이른 명퇴 후에 대안학교에서 봉사를 하신다. 여전히 열정적인 은사님은 거침이 없으면서도 상대를 난감하게 하지 않는다. 은사님을 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면서 오랜 세월 꾸준히 돈을 모은 이복순 김밥할머니, 우동장사 김복순 할머니의 기부금 쾌척을 보면 나는 속이 불편하다. 종군위안부 피해자인 김군자 · 황금자 할머니가 기증한 장학금은 또 어떡하나. 나는 왜 이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못해 부아가 나는 걸까. 거액의 기부금 같은 건 대기업에서나 해야 마음이 편한데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내 침대에 눕혀본다. 그의 키에 맞춰서 내 침대를 기꺼이 늘이거나 자를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나눌 때의 뿌듯함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보이는 부와 보이지 않는 부, 모두 가진 사람이다.
이렇듯 내게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나를 난폭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일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함께 있으면 세상이 어둡고 불안해진다. 애정 없는 비판은 야비한 비난일 뿐이다. 늘 툴툴대는 그를 내 침대에 눕힌다. 가차없이 두 팔을 침대 밖으로 내려친다. 누군가를 안아보지 못한 팔은 무용지물이다.
교만을 권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거드름에 고개 숙일 만큼 순하지 못한 내 성깔을 자극한다. 이런 사람은 내 침대에 눕혀 목을 밀어낸다. 고개를 숙여보지 못한 그의 목은 이미 굳어있다. 단칼에 내리치고 잊어버린다. 이런 사람은 '무시'하는 것이 약이다. 비겁하게도 나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만 칼날을 휘두른다.
행여 미래에라도 부의 물결에 합류하려면 경제학자나 금융전문가를 따르는 것보다 내 잣대에 넉넉한 사람들과 손잡아야 한다. 토플러가 말했듯이 경제논리에 따라 살지 않더라도, 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의 한계를 늦게나마 알아차린 내 계산에 손해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나만의 침대도 바뀐다. 요즘 머리에 맴도는 것은 ‘말랑말랑한 사람’이다. 머지않아 내가 들이대는 절대의 잣대가 또 바뀔지도 모른다.
아테네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파르테논 신전, 육중한 돌기둥 속속들이 상처투성이다. 디오니소스극장의 돌무더기 위에서 열렬하게 펼쳐졌을 비극을 읽는다. 지중해의 사정없는 햇살 아래서 나는 자꾸 힐끔거린다. 어디선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억센 손이 내 목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다. 어서 아테네를 벗어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