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카페 /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그는 떠났다
노정숙
요즘 4대가 한 지붕 아래서 북적인다.
동경에 사는 딸이 외손자를 데리고 둘째를 낳으려 친정에 왔다. 병원에서 검진하는 일은 왜 그리 잦은지. 산달이 가까워지니 매주 초음파를 통해 태아의 머리와 다리, 가지런한 등뼈까지 훤히 들여다보며, 풍덕풍덕 힘차게 뛰는 심장소리까지 듣는다.
새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던 중에 레비 스트로스가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슬픈 열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브라질 원주민들의 사진으로 시작하는 두꺼운 책은 그 적나라한 영상이 심란하게 따라붙어 독서의 진행을 방해했었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냉소적인 역설로 시작하는 여행기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가보지 못한 곳들의 생활과 풍습이 세세히 적혀있다.
북아메리카 부족들은 사춘기에 이르면 스스로 선택한 시련을 겪는다. 어떤 이는 먹을 것도 안 가진 채 홀로 뗏목을 타고 흘러가고, 어떤 사람은 맹수와 추위, 그리고 빗속에 몸을 드러낸 채 고립되어 산속으로 들어간다. 또 어떤 이는 몇 주일, 몇 달씩 음식을 끊고 단지 야생의 것으로 연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과 기도가 절정에 달하면 초자연의 세계와 통하게 된다고 믿는다. 이렇게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킨 힘으로 집단의 특권과 서열을 결정한다.
원주민 추장에게서 지도자의 덕목을 배운다. 유랑생활을 이끌고 여정을 결정하는 지도자지만 공인된 권력이나 권한은 없다. 그는 오직 솔선수범하며, 관대함이라는 능력만으로 지도력을 이어간다. 그곳에는 문자나 문명이 닿을 수 없는 질서가 있다. 개인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부(富)는 개인의 것이 아닌, 가축을 포함하여 사회적 도의적으로 나누어진다. 그들은 전통적 기술을 버리지 않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원시인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비문명사회의 지혜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질적인 것을 자신의 모습대로 모두 동질화해버리는 서구문명의 폭력성을 확인하고 그가 속한 사회에 분노하며 그로 인해 파괴된 열대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서구를 '문명'으로 비서구를 '야만'으로 구분하던 당시 서구인의 눈에 비친 원주민은 길들여져야 할 대상이었지만, 『슬픈 열대』이후 비로소 서구인들처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자연자원의 남용과 환경 파괴, 유전자 조작에 복제까지 거침없는 문명의 발달은 인류와 자연의 재난이 되고 있다. 인류의 멸망을 예상하는 시간도 점점 빨라진다. 열대에 대해 ‘슬픈’이란 형용사를 거두고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동경’에 이르렀다.
격하게 설레는 미지의 세계는 내 역마살을 들쑤셨다. 그 자극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여행가방을 챙기게 했다. 훗날 인도에 갔을 때 그의 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있어 물질적인 것은 아주 ‘조금’만으로 충분하다는 인도. 그곳의 부산한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생한 눈빛에서, 또 낯선 사람에게 안식을 빌어주는 정중한 인사에서 영혼의 넉넉함을 공감했다.
레비 스트로스가 떠난 후 『슬픈 열대』를 다시 펼쳐보니, 기하학적인 문양을 한 카두베오족의 얼굴에서 생소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독창적인 예술표현으로 다가온다. 벗은 몸으로 춤을 추며 치르던 장례식 모습도 이젠 자연스럽다. 한껏 처진 가슴에, 가슴보다 더 나온 배가 민망스러웠던 보로로족 여자의 모습을 보며 선웃음이 지어지는 건 뭔가.
코를 뚫어 깃털을 꽂고, 팔뚝이 패이도록 줄을 묶어 장식한 남비콰라족의 조인 팔뚝이 더 이상 안쓰럽지 않다.
낮잠을 즐기고 있는 임산부의 모습에서 멈췄다. 귀를 세운 개가 어슬렁거리고, 나뭇가지들이 흩어져있는 맨땅에 한쪽 다리를 당겨 모로 누워있다. 걱정스러웠던 임부의 모습이 그지없이 편안해 보인다.
내 곁에 있는 임부 때문인가. 우리는 다른 사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비춰본다.
늦둥이인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친정엄마는 우리 아이들한테 전력투구하셨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달린 식구가 많다. 게다가 시답잖지만 글도 써야하고, 가끔씩 딴짓거리도 해야 숨통이 트이니 야단이다. 어쩔 수 없이 날라리할머니가 되겠지만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볼 작정이다.
그는 마지막 행로인 차웅(불교사원)에서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고 했지만 인류는 이어진다. 구조주의 인류학자로 예술을 즐기고 세계를 사랑한 거장, 한 세기를 온전히 살아낸 휴머니스트,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는 떠나고 또 새 생명은 온다.
<현대수필> 201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