冊, 울다
노정숙
불안했다.
나는 그저 얌전하게 눈 맞추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시멘트벽을 향해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저항도 못하고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나가 떨어졌다. 당장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울혈이 깊이 들 것이다.
이건 뭔가. 때도 없이 당하는 이 수모는, 이러고도 숨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분신(焚身)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서글프다. 억울한 건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는 데 있다. 처음엔 좀 어눌해도 조금 인내심을 발휘해 주면 그런대로 쓸 만한 말이 있는데 말이다.
그가 성질이 고약한 줄은 알았지만 요즘 들어 폭력이 더 심해졌다. 그의 듬성한 눈썹과 치켜든 눈꼬리를 보면 누구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으리라. 책상에 앉아 몰수할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긴 내게만 부리는 성질이 아니긴 하다. 며칠 전에는 신문을 보다가 뭐 이런 것들이 있나, 하며 씩씩대더니 신문을 구겨서 박박 찢어버리기도 했다.
부숭숭한 머리를 빗지도 않은 오늘 아침, 그는 난데없이 화려한 내 겉모양새에 대하여 툴툴거리더니 두 번째 패대기질을 했다.
이건 더욱 억울하다. 서비스 차원으로 겉모양새에도 공을 들였는데. 정성을 쏟은 만큼 그럴듯한 모습에 내심 흡족하기도 했는데, 이런 내 예의를 현혹이라고 몰아 부치다니.
천연색 하드커버 모서리가 뭉개졌다. 모서리가 뭉개져야하는 건 내가 아니라 자신의 성질머리란 걸 왜 모르는가.
인간이란 백인백색으로 그 요사함을 일찍이 풍문에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해를 더할수록 참을성이 없고 난폭해지는 건 당해낼 수가 없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화나게 했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지난한 정서를 끌어온 이야기가 궁상스러웠을까. 음풍농월에 가까운 풍류가 시대감각에 뒤쳐져 보인 걸까. 시시로 외롭다면 가슴을 열어 보인 것에 식상했나.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그의 비위를 맞춰줄 입담 좋은 친구가 필요한 건가. 화끈한 충격요법이 필요했던 건가. 그의 머릿속에 넘치는 지식들이 곰삭지 못하고 울컥거리는 것이 보인다.
다양해진 세상에 단숨에 즐길 일이 많다는 것을 난들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나와 마주 앉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 고맙고 대견해서 오늘도 참고 또 참는다.
뒤 돌아 보면 나무로 서 있을 때가 좋았다.
친구들은 키가 작거나 크거나 가리지 않고, 든든한 몸이나 여린 몸에 상관없이 넉넉한 햇볕과 바람에 흥겨웠지. 그땐 누구든 당당한 대접을 받았지. 내 몸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라나 뭐라는 몸내가 건강에 좋다나, 아예 옷을 홀랑 벗고 나대는 인간도 있었지.
어떤 인간은 이미 건강한 등짝으로 더 건강한 무엇을 얻으려는지 내 옆구리를 쿵쿵 치받는 것이다. 머리까지 띵 하는 기운이 울려 퍼지면 잠시 어지럼증을 느끼긴 했만 나도 뭔가 좋은 일을 한 듯한 보람으로 기분이 괜찮았다.
이렇듯 내 몸이 귀한 곳에서 비롯되었는데 좀 서툰 말을 새겼다고 해서 이런 기막힌 대접을 받아야 하나. 그 서툰 말 속에 새겨진 것들이 단방에 희열을 주지는 못한다 해도 내 땀과 피가 배인 것을 어찌 몰라주는가.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그늘을 주고 향내를 주며 멋진 모습을 보습을 보여줄 때가 좋았다. 내 몸이 잘리고 풀려서 책이라는 물건이 된 후로 내 회의와 괴로움이 시작됐다.
그러나 내 친구들이 모두 나 같은 대접을 받은 건 아니다. 10년, 20년 내공을 쌓아서 인지 천부적 재능 덕인지 처음부터 추종 세력을 몰고 다니는 애들도 있다. 내겐 패악을 부리던 그도 이를 껴안고 부비며 허름해지도록 끼고 지낼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필사를 하며 외우기까지 한다.
껍데기가 비슷하다고 알맹이도 같은 건 아니다. 드물게 만나는 알속찬 친구들을 보면 주눅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랴. 그들이 있어 명편의 멸종을 면하는 걸. 비슷한 겉모습을 하고, 아무리 많이 늘어져 있어도 눈 밝은 사람들은 명편을 찾아내는 법이니까.
억울하다. 되돌아 봐도 쉽게 쓴 말 없고 허투로 한 말 없는데, 나는 나대로의 색깔과 향이 있는데.
나도 쾌적한 서고(書庫) 잘 보이는 곳에 당당하게 서 있다가 어떤 이의 손때로 매끈해지고 싶다. 나를 보며 가끔 멈춰서 고개도 끄덕이고, 또 아주 가끔은 눈물도 질금거려서 내 몸 군데군데 얼룩이 지기도 했으면 좋겠다. 자주 넘긴 흔적으로 내 몸이 약간 부풀어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냥 나무로 서 있어야 했을까.
휴지로도 쓸 수 없게 단단히 차려입은 새 친구들이 카터기에 잘려나가기도 한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또록대는 문자들이 국수기계에서 빠져나오는 국수처럼 길게 잘려서 나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런 조화 속을 어찌 비켜나갈까. 다만 내동댕이 쳐진 걸 행운으로 알아야 하는지.
그는 나를 내동댕이치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빈둥대는 시간이지만 오히려 자기의 시간을 죽였다고 툴툴대는 눈치다. 나처럼 패대기쳐져서 쌓인 애들 때문에 그의 방은 까치발을 들고 다녀야 할 지경이다.
밥이 되지 못하는, 출판의 자유를 막아야 하는가.
마음 먼저 달려가는 어설픈 고백과 울뚝불뚝 치받고 올라오는 대책 없는 열정만으로 밀고 나간 것이 내 잘못이다. 유려하게 분칠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다. 눈이 번쩍 뜨일 삼박한 말을 찾지 못한 건 내 죄다.
그러나 혀끝이 달콤하지 않다고 투정하며 내 진면목을 헤아리지 못한 건 그의 잘못이다. 민얼굴의 신선함, 꾸미지 않은 날生 것의 풋풋함을 읽어내지 못한 건 그의 실수다. 반짝이진 못해도 내 깊은 속내를 따라오지 못한 건 그의 죄다.
속 보이는 겸손보다 차라리 뻔뻔함으로 나는 나를 위로한다. 이런 억지조차 못 부린다면 어찌 이 울혈을 삭히겠는가.
그는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이 사회에 대해 늘 불만에 차 있다. 그의 굳어진 표정을 풀고 마음을 열어줄 말이 무엇일까. 그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되살릴 묘수가 없을까.
궁리만으로 분주한 나도 언젠가는 내 꼴에 맞는 값을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도 마지막 명편 하나를 위해 습작을 하고 있다는 쪽에 선다.
다시금 내동댕이쳐진다 해도, 나무로 서있던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겠다.
<수필시대 2010. 1,2월 >
<冊, 울다> 를 읽고
-강표성
한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공감과 감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글중에서 두 가지 효과를 다 얻기는 어렵다. 공감의 문제가 해결되면 감동이 떨어지고, 감동은 있는데 소통의 관계까지 건너가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다. 좋은 글을 쓰기가 어려운 이유다.
어떤 원로 선생님은 작품을 평하기 전에는 작가를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작가를 보면,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부분에서 찔리는 구석이 있다. 나는 노정숙 작가를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활자를 통해서 작가에 대한 친밀감을 혼자 쌓아둔 것은 훨씬 전의 일이다. 어쨌든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 작품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글이 평론에 미치지도 못할 뿐더러, 그럴 욕심도, 능력도, 없음을 미리 밝힌다. 부족하나마 내 느낌을 정리하고픈 마음이다. 가벼운 감상문이라고나 할까?
<冊, 울다>라는 작품은 나무의 입장에서 쓴 의인체 수필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제목이 먼저 시선을 끈다. 책이란 글을 한자로 쓰고 있어서 책이란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는 느낌이다.
불안했다, 이렇게 시작하는 도입 부분도 독자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대체 왜 그럴까, 궁금해진다. 이어서 책이 패대기쳐지는 수모와, 분신조차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털어놓는다. 세세한 묘사가 깔끔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기 족하다.
그는 왜 책을 던질 수밖에 없는가?
신문을 패대기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껏 골라든 책을 내동댕이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집중해야 될 필요가 있다. 지난한 정서와 시대에 뒤떨어진 음풍농월, 과도한 정서 분출, 거기다 화려하기만한 외양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일종의 자아 비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걸 어쩌겠는가. 이는 수필계뿐만 아니라, 문학 동네의 전반적인 증세다. 그러하니 외화내빈이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출판의 홍수라는 말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이다.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키운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진다고 한다. 가끔 이름 모를 나무들에게 미안해진다. 요즘 세상을 죽편의 가죽 끈을 다시 매는 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출판물의 홍수에 대해선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부드럽게 꼬집는 작가의 글을 살펴 보자.
‘휴지로도 쓸 수 없게 단단히 차려입은 새 친구들이 카터기에 잘려나가기도 한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또록대는 문자들이 국수기계에서 빠져나오는 국수처럼 길게 잘려서 나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런
조화 속을 어찌 비켜나갈까. 다만 내동댕이 쳐진 걸 행운으로 알아야 하는지.’
상당히 고급스런 은유와 직유조차 쓸쓸하게 느껴진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단지 출판 문화에 대한 언급에서 그친다면 이 글은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후반부에 이어진 글들을 통해서 글쓴이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 내겐 패악을 부리던 그도 이를 껴안고 부비며 허름해지도록 끼고 지낼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필사를
하며 외우기까지 한다.’
‘ 나도 쾌적한 서고(書庫) 잘 보이는 곳에 당당하게 서 있다가 어떤 이의 손때로 매끈해지고 싶다.
나를 보며 가끔 멈춰서 고개도 끄덕이고, 또 아주 가끔은 눈물도 질금거려서 내 몸 군데군데 얼룩이
지기도 했으면 좋겠다. 자주 넘긴 흔적으로 내 몸이 약간 부풀어 있으면 더욱 좋겠다. ’
책다운 책을 보고 싶은 마음,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이다. 명편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영웅을 만들어내듯 명편도 일개 개인의 결과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집적물이겠다. 혼신의 힘을 다 할 때에나 얻을 수 있으리라. 작가는 여기서 다시 자아비판을 한다. 징처럼 나를 때려서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고도의 수법이다.
‘ 마음 먼저 달려가는 어설픈 고백과 울뚝불뚝 치받고 올라오는 대책 없는 열정만으로 밀고 나간 것이 내 잘못이다. 유려하게 분칠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다. 눈이 번쩍 뜨일 삼박한 말을 찾지 못한 건 내 죄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징소리가 너무 큰 것 같다. 어찌 보면 역설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가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인 묘사 부분에서 치밀하게 유지되던 ‘거리 두기’가 ‘동일시’로 이어져서 다소 혼란스럽다. 좀 더 치밀하게 작가와 나무와의 간격을 유지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궁리만으로 분주한 나도 언젠가는 내 꼴에 맞는 값을 할 때가 올 것이다. 나도 마지막 명편 하나를 위해 습작을 하고 있다는 쪽에 선다.’
여기서도 나무와 작가와의 거리가 없어 보인다. 앞에 예로 들었던 단락, '마음 먼저~ 내 죄다' 와 연결해서 읽어서인지 나무가 명편 하나를 습작한다는 말로 읽힌다. 이는 나만의 오독일까? 아니면 옥의 티라도 찾아야 한다는 나의 강박일까?
<冊, 울다>는 정갈한 문체로 읽히는 맛도 깔끔하다. 바람에 구름 가듯이, 천천히 그러나 치밀하게 할 말을 다 한다. 가독력이 뛰어난데다 작품으로서의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다. 먼저, 세련된 문체가 돋보인다. 유려한 글은 읽는 이를 기쁘게 한다. 거기다 말하고자 하는 문제의식과 이를 뒤받침하는 일관된 구성도 빼놓을 수 없다. 나무로 대변되는 작가와 그로 대변되는 독자의 입장을 공평한 시선으로 넘나드는 균형감각도 좋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 공감의 폭이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글에 나름대로의 율조가 있어서 읽는 이를 편안한 흐름으로 인도한다. 이런 점들이 바로 노정숙 작가의 힘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의 끝맺음도 산뜻하다. '다시금 내동댕이쳐진다 해도, 나무로 서있던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겠다.' 는 부분은 글 쓰는 이들이라면 공감하는 내용이리라. 나무를 통해서 자성과 환기에만 머물고 있지 않는 태도가 압권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들에게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하겠다. 언젠가는 한 편의 명편을 만들고 말리라는 장인 정신이 아름답다. 이 부분에서 긴 여운이 남는다.
보편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감과 감동을 주는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은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고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이들은 이글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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