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기행수필 작품론

칠부능선 2011. 11. 30. 20:38

[작품론] 

 

노정숙 수필의 철학적 독서-존재 미학과 소통으로서의 변주

한상렬

hsy943@hanmail.net

 

 

1. 들어가기

 

최근 우리 시대의 글쓰기는 ‘발표’라고 하는 제도권 내에서의 자기 증식의 욕망과 상당히 관련되어 있다. 이는 발표 행위의 누적을 통해 인지도를 획득하고 나아가 문단권력 또는 매체권력에 편입하려는 제도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비평이 취해야 할 반성적 대상은 이같은 타자를 앞지르려는 자기 축적의 원리에 있을 것이다.

발표 행위에만 외곬으로 매달릴 때 그 주체는 강력한 수사학의 구축이라는 방어기제를 동원하게 되고, 개괄에 대한 성급한 욕구를 통해 성긴 도식을 곧잘 불러오게 된다. 그럴 경우 그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예외적 가편佳篇들에 대한 해명은 온데 간 데 없기 십상이다. 필자 역시 이러한 잘못에서 자유롭지 않다.

상투적인 소재나 반응에 의존하는 작품은 워렌Warren의 비유처럼 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는 것이나 공중낙하와 비슷한 것이 된다. 이는 언어의 무임승차일 것이다. 시인의 경우, 황금을 찾아내는 시적 열정이 아니라 도금鍍金을 통해 시인이라는 명망을 겨우겨우 유지하고 있는 언어의 세공사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의 시인인 벤G.Benn의 말을 빌리면 “서정적 자아는 자아와 그의 언어재고言語在庫라는 두 극 사이에 휩싸인 채” 시를 쓰는 영혼이 된다. 타원의 곡선은 처음에는 원심력 방향으로 서로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구심력 방향으로 움직여서 유유히 가라앉는다. 그럼으로 작가는 타자와 화응和應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를 통해 일상성이라는 폭력을 넘어서 문학적 예지로 삶의 리듬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야말로 설익은 타나토스* 충동에 기저를 둔 음울한 시대의 포즈를 넘어 한 시대를 읽어내는 미더운 측후법測候法이 될 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본성 중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 환원시키려는 죽음의 본능을 가리켜 타나토스라고 불렀다.)

 

 

2. 노정숙 기행수필의 외곽外廓 읽기

 

 

노정숙의 일련의 기행수필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의 언표들은 몸, 현실, 그리고 담론의 공간이 각별하다. 그의 수필은 일반적인 기행의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작가의 내적 감각 일테면-사막과 바람, 신과 죽음, 고려인과 우즈벡인, 전통적 관습과 천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낯선 질료를 통해 사유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신과 죽음, 전통적 관습과 천민은 몸을 가진 존재이며, 이 몸을 통해 사막과 바람, 고려인과 우즈벡인, 가해자와 피해자에서 보듯 타자를 끌어들여 새로운 몸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그의 수필은 언어가 가진 미감과 언표장으로서의 언어의 기의 속에 철학적 담론의 가로지르기가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런 수필쓰기는 일상성에 매몰된 우리 수필문단에 새로운 바람이 될 것이다. 그래 그의 수필은 문학화의 최 일선에서 본격수필을 지향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의 수필은 언어예술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정숙의 기행수필에서 보여주는 중요한 인자는 그 다원적 텍스트에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기행수필이 여정과 견문이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 비하여 그의 수필은 중심 주제인 재현representation의 상투성에서 자유롭다. 이런 경향은 이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언급한 “사물의 의미 전달이 아니라 사물의 의미화”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학’을 ‘메시지의 틀’이라고 한 로만 야콥슨Jakobson, Roman은 모든 언술에서 기표가 임의로 의미를 생성하도록 하며,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을 주장하는 기의의 억압에 도전하였다. 그래 2차 언어인 메타언어를 통해 언어의 권위를 파괴함으로써 무한한 회귀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바흐친Bakhtin에 의하면 예술 언어는 일상 언어와의 형식적 동일성이나 차이에 의하여 정의되지 않고, 일상 언어가 지닌 잠재력의 극대화로서 파악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형식에 내용을 결합하고 ‘현실반영’ 개념의 맹점을 제거함으로써 형식주의와 리얼리즘의 한계를 동시에 넘어서게 된다. 즉 다양한 사회와 이념적 언어들의 예술적 묘사라는 ‘실체로서의 현실에 대한 반영’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도, 작품 속에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이 담겨야 할 필요성으로 암시해 준다.

무엇보다 노정숙의 기행수필의 특장은 낯설게 하기의 기교일 것이다. 예술적 기교로서의 낯설게 하기는 동기화에서도 드러나지만 지배소dominant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야콥슨은 이를 후기 형식주의의 중요개념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문학이 리얼리티를 낯설게 만드는 게 아니라, 문학 그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문제에 언급하였다. “다른 나머지 요소들을 지배하고 결정하며 변형시키는 예술작품의 요소로 지배소를 정의하여 작품을 결정하는 초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작품의 통일성이나 총체적 질서gestalt를 가능케 해 준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시각예술이 지배소였고, 낭만주의 시에서는 음악이, 리얼리즘의 지배소는 언어예술이었다. 일반적으로 ‘낯설게 하기’는 슬픔이나 친숙한 모습 대신 세밀한 언어적 표현만을 보여준다. ‘날 것으로 드러내기’일 것이다. 슈클로프스키Shklovsky는 이런 기교를 문학의 본질적인 행위로 보았다. 이런 ‘낯설게 하기’와 ‘드러내기’ 개념은 독일의 극작가이며 시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Brecht, Bertolt의 ‘소격 효과疏隔效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술은 그 자체의 과정을 숨겨야 한다는 고전주의적 이상의 도전이었다. 이는 기만적 현상 뒤에 숨겨진 현실의 본질적인 모습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통해 대중들의 현실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서 노정숙 수필의 텍스트는 외곽外廓인 언어예술로서의 지배소를 찾게 한다. 바흐친이 텍스트를 유기적 통일체로 보아 독자에 의해 심미적 통일로 결합되는 통합적 구성으로 간주한 것과 같이 노정숙의 텍스트는 언어적 구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그의 기행수필에서 보여주는 수필세계는 언어미학적 측면에서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존재 미학과 ‘몸’을 통한 소통으로서의 변주를 보여준다.

 

 

3. ‘몸’의 사유를 통한 존재 미학

 

 

일찍이 니체는 그의 《권력에의 의지》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몸을 통한 세계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과 ‘몸의 해방’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과 해체가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이래 장구한 이분법적 사유 속에서 언제나 영혼과 이성적인 정신에 의해 억압 받아온 몸을 새로운 존재론적, 인식론적 주체로 인식하려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정과 긍정, 파괴와 창조, 해체와 생성이라는 전위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동양에서도 이런 ‘몸’에 대한 탐구는 서구 못지않았다. 율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는 인심을 순수한 본질의 존재가 아니라 이기理氣의 교차 즉 ‘살’인 몸으로 보았고, 김용옥은 몸을 일종의 ‘기’의 집합으로 보았다.

노정숙의 수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나 <신들의 도시>는 감성적 언표로서의 존재에의 사유가 개념적 언표로 변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성적 언표는 비교적 보편적이고 단순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두 분야에서만 개념적 언표에 능숙할 뿐, 다른 분야에서는 감성적 언표와 더불어 살아간다. 기행수필의 경우, 만연한 기행체는 그저 여행보고서나 안내서에 급급한 게 수필문단의 사정이다. 그런 경향성에 비추어 노정숙의 기행수필은 사뭇 낯설다. 앞의 두 수필에서 보듯 그의 수필쓰기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담론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여기서는 흔히 산만구성으로 서사를 중심을 한 기행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평적 사고의 확산이다.

비얀고비, 부자사막이란 의미이다. 그의 감성적 언표 안에는 고사목이 들어와 있다. “모진 바람에 휘어진 모양새가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시각적 표현은 사유의 단초일 것이다.

 

사막은 바람의 품 안에 있다. 모래언덕 아래 그늘을 만들어 잠시 쉬기도 한다. 맨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은 바람의 혀처럼 부드럽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은 모래구릉을 뜨겁게 달구고, 밤이 되면 시린 달과 별들이 내려 그 열기를 식혀준다. 뜨거운 모래를 조금만 힘주어 들어가면 속살의 서늘함에 정신이 아뜩해진다. 사막의 생명력이 전해온다.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서

 

‘사막’과 ‘바람’.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사막은 바람의 품 안에 있다.”는 표현은 “아, 소박한 이들의 부자여. 비얀, 비얀 입안에서 구르는 말 맛 만큼은 풍성하다.”는 언술과 맥을 같이하면서 언어가 지닌 기의와 기표를 풍요롭게 한다. “사막은 바람의 품 안에 있다.”는 화자의 낯선 언술은 그야말로 ‘날선’ 사유의 시발이다. 하여 노정숙이 부려쓰는 언어는 바로 철학적 사유가 된다. 실상 철학은 언어와 늘 일정 정도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언어는 철학적 사유의 기본조건이었다. 철학은 사물과 경험에 이성의 빛, 언어의 빛이 내리쬘 때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로고스logos를 주는 것, 사물과 경험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추론하고 논의하는 것이었다.

 

사막의 끝은 어디일까, 어느 바다에 다다를까, 가파른 벼랑에 이를까.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맞닿은 저 끝이 궁금하다. 고사목 위에 잠시 앉았다 떠나는 새는 또 어디서 쉴까. 무리를 이탈한 새는 홀로 넉넉한 풍경이 되어 사막과 잘 어울린다.

지평선에 닿아있는 사막 저편에 대한 동경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둔덕을 기신기신 넘는다. 모래사막 한켠에 수직의 언덕이 있다. 거의 직각으로 경사진 모래언덕은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밟는 즉시 발자국은 스르르 흘러내린다. 저항 없이 함께 흘러내린 곳에서 다시 올라오는데 노고가 필요하다. 직각으로 꺾어 오르는 다리가 떨린다. 가슴의 통증은 어디서 따라온 것일까. 이내 나를 흔든다.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에서

 

화자는 지금 사막을 걷고 있다. 이 수필을 두고 어찌 구체화된 체험의 형상화로만 이야기하랴. 화자의 시야에 들어온 사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화자의 사유를 통한 표층과 심층에 가 닿아야 한다. 여기 화자와 타자라는 질료가 상징적으로 구체화된다. “사막 초입에서 땟국 흐르는 얼굴에 말똥내를 풍기는 유목민 아이들을 만났다.”가 그것이다. “저들의 검게 탄 피부는 초원의 건조함을 닮았으며 깊은 웃음은 사막의 허허로운 바람소리에 이어진다. 저들의 눈동자는 하늘이 만들어주는 사막의 빛깔처럼 깊다.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고 지리가 있을 뿐이라는 들뢰즈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로 들린다. 나그네의 목적지가 장소가 아님을 모르는가. 그들의 광활한 수평에 대한 열망을 잊었는가.”라는 화자의 사유는 바로 ‘몸’의 사유를 통한 존재 미학의 발현이다.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고 지리가 있을 뿐”이라는 들뢰즈의 목소리는 작가 자신의 사유의 결론일 것이다.

마음은 몸과 말을 떠나서가 아니라, 오직 그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때 비로소 유일한 삶 속에서 체험하는 무한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띨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체험한 무한과 죽음만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효하고 유의미한 무한이고 유일무일한 죽음이 될 것이다. 이른바 유형의 초월, 몸은 몸으로써 넘어도 몸은 그대로 남고, 말을 말로써 넘어도 말은 그대로 남는다. 그렇기에 삶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윤회생사의 세계인 바르도Bardo, 곧 유정有情이 태어남으로 인해 처할 수밖에 없는 유형지流刑地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몸을 입음으로 인해 치러내야 할 형벌, 유형有形은 또한 유형流刑이 된다.

 

수필 <신들의 도시>는 ‘몸’의 사유이다. 무한과 죽음이라는 체험이 근간을 이룬 이 수필은 존재 미학으로 보면 단연 탁월하다. 여기 ‘몸’은 자아와 세계, 텍스트의 안과 밖, 의식과 무의식,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으로서의 인간존재에 대한 사유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감성적 언표를 중심으로 출발한 이 수필은 개념적 언표로서의 존재규명에 천착한다. 감성적 언표의 홍수 속에 갇혀 있는 현대인에게 다양하고 역동적인 이런 몸의 존재성은 ‘몸화’하는 언표로서의 언어 기의일 것이다.

신들의 도시 카투만두의 화장터를 묘사한 수필 <신들의 도시>는 [화장터→ 흰 연기← 힌두사원]이라는 감성적 언표에 [죽음을 기다리는 집→몸]으로서의 개념적 언표가 자리잡고 있다. 죽음과 금빛 지붕의 힌두사원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비적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사유는 존재의 통찰이다. 해석과 주제의식이 확연한 “이 땅은 죽음을 기다리는 거대한 집이다.”라는 명제는 카투만두의 화장터를 “깔끔하게 단장한 벽제화장터, 숫자로 전광판에 표시되는 죽은자들의 마지막 모습”과 대비하면서 삶과 죽음의 성찰을 마무리하고 있다.

 

깔끔하게 단장한 벽제화장터, 숫자로 전광판에 표시되는 죽은자들의 마지막 모습. 연기도 냄새도 울부짖음까지도 삼엄하다. 요즘 서울이나 지방의 화장터가 포화상태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줌으로 남을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지 못하고 납골당에 모셔 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그것조차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시 보니, 이 땅은 죽음을 기다리는 거대한 집이다. 예정된 죽음을 향한 나들이, 조금 더 재미있게 놀다 가나, 힘겹게 놀다가나 멀리서 보면 아주 작은 차이가 아닐까. 가볍게 재미있게 발자국만 찍었으면 좋겠다. 기다리지 않고 예고 없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다.

나는 왜 잠시 머문 그곳에 이렇게 오래 잡혀 있는가.

 

-<신들의 도시>에서

 

이렇게 노정숙의 수필은 그저 기행의 보고서가 아닌, 화소를 자기화하고 철학을 담은 존재 파악의 문학이요, 그 담론에 철학이 들앉아 있다. “나는 왜 잠시 머문 곳에 오래 잡혀 있는가.”라는 독백은 자문자답이다. 담론 자체가 감성적 언표로 감각적 이미지를 다분히 수용할만한 작품이지만 전혀 그런 기미를 엿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의 사유는 우리가 궁극적인 형식으로 삼는 몸에 대한 문학적 존재 미학일 것이다.

 

 

4. 텍스트의 미적 감수성과 소통의 코드

 

내 안에 잠재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작업이 수필쓰기다. 그곳에서는, 미지의 세계에 목마른 방랑기와 풍류에 흩날리고 싶은 바람기도 허락한다. 위악僞惡의 옷을 입고 손닿지 않는 현실에 조소를 던지기도 한다. 벗음으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노정숙의 창작노트 <선 채로 꾸는 꿈>에서

 

노정숙의 수필에서는 노마드nomad와 같은 바람이 분다. 내적감각으로 받아들인 사유의 샘. 그게 다름 아닌 기행수필이다. 그래 그의 수필을 음미하노라면 텍스트의 즐거움에 빠지게 한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독자의 즐거움을 두 가지 의미로 구별하였다. 하나는 관능적 쾌락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희열이었다. 그의 수필 읽기는 그중 정신적 희열을 느끼게 한다. 정화되고 체화된 사유의 세계가 주는 즐거움이다. 여기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성 속에 녹여 넣음을 의미한다. 즉 감성적 언표들을 개념적 언표 속에 용해시키는 작업이다.

바슐라르Bachelard,Gaston는 이런 합리주의를 ‘sur-rationalisme'이라고 불렀고, 레비스트로스는 ’hyper-rationalisme'라 하였다. 전자의 바슐라르는 과학적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개념적 언표들이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감성적 언표들과 불연속적으로 성립해야 함을 강조했다. 생물학자, 경제학자, 화가는 현실 속의 이른바 '사과'라는 언표를 서로 다른 개념적 언표들을 동원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그런데 노정숙의 수필은 이런 담론화의 양태 즉 개념적 언표를 감성적 언표로 보여주기도 한다. 다시 그의 창작노트를 보자.

 

오감을 열고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수필적 삶이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도 소재가 된다. 베란다에 방치된 화분에서 움트는 새싹을 보며 그 줄기찬 생명력을 노래하고, 부모님과의 대화는 늘 과거에서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인생의 순환을 깨닫는다. 전혀 새롭지 않은 뉴스는 비자금, 괴자금으로 악취를 풍기지만, 신문을 뒤적이다 시장 할머니의 전 재산을 장학재단에 기부하는 가슴 따뜻한 순간들을 새겨둔다.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들을 뒤집기도 하고 비틀어보기도 하며 분석한다.

 

-노정숙의 창작노트 <선 채로 꾸는 꿈>에서

 

그는 오감을 열고 있다. 그리고 그 자체를 즐기고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기행수필은 맞춤하다.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는 그 안에 개념적 언표를 함의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수필은 이런 일상을 감성적 언표로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수필 <그곳, 타슈켄트>, <그대 안녕한가>, <멈춰버린 시계>가 그러하다. 이들 작품들은 텍스트가 주는 읽는 즐거움, 정신적 희열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존재 미학에 이르는 소통의 변주에 접근하게 한다.

<그곳, 타슈켄트>는 티무르광장에서 반갑게 한국인을 맞는 우즈벡 사람들의 밝은 얼굴과 대비되는 고려인들의 표정을 담고 있다. 그가 첫 번째로 만난 우즈벡 남자는 기내 화장실 앞이었다. “나 한국사람 좋아해요, 반갑습니다.”라던 그는 산업연수생으로 와 2년 간 부산의 오뎅공장에서 일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검은 눈동자의 순박한 남자. 이것이 우즈벡에 대한 인상의 단서였다면, 그가 <전쟁과 한민족 문학>을 통해 다시금 조우한 그들은 “조국 전쟁에 희생 당한 우리 한민족의 한 많은 생애, 그들의 상처를 무엇으로 위로할까. 문학이 구원이 될 수 있는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가.”라는 사유의 빌미를 제공한다.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에 징집당해 연해주로 끌려간 선조들은 전쟁이 끝나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다시 러시아로 내 몰리고, 그곳에서 겨우 삶의 기반을 마련할 즈음 하루아침에 빈 몸으로 차에 실려 황량한 위성국의 들판에 떨어뜨려져 살아왔다고 한다. 굴욕의 역사를 몸으로 산 그들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지금에 와서도 조국에 마음대로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을 어찌 받아들일까. 조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 해외의 동포들에게 어떤 힘이 되고 있는가. 감당할 수 없이 큰 빚을 진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곳, 타슈켄트>에서

 

화자는 그들의 얼굴에서 “조국을 둔 우리 동포, 한민족의 수난사”를 읽어내며,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진 착잡한 심정”이 된다. 그리곤 “고려인들은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한글로 된 책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에 착목한다. “돌아와서는 금세 잊어버리고 만 일이었지만 그 당시 마음은 당장이라도 쌓여있는 책들을 보낼 생각이었다.”가 그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소통이다. 텍스트의 미적 감수성과 함께 소통의 코드를 확인하게 한다. 한민족이란 동질성에서 기인한 사유의 산물인가. 화자의 인도 기행은 더욱 절실한 소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묻는다. <그대 안녕한가>라고.

기름기라곤 하나도 없는 그저 먼지만 풀풀 날리는 “간신히 연명하고,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힘만 주어진 땅” 그게 화자가 만난 인도이다. 자이푸르 시장통 ‘바람의 궁전’ 돌계단에 걸터앉아 연신 중얼거리는 여인, 암베르 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떡진 머리에 땟국 절은 아이들의 물구나무서기. 화자는 “지나는 꽃들에게 비루먹은 나무들에게 묻는다.”고 했다. “간신히 연명하는…” 그들의 안부를 묻는다. “여윈 몸에 붉은색 꽃무늬의 사리가 친친 감겨있”던 여인”에게 그리고 “구걸이 아닌 일상의 무표정-마치 선행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고맙게 받으라는 듯 당당”하던 아이들에게. 화자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엄연한 존재의 문제에 당면한 인식론적 철학은 비로소 배태胚胎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인도는 사유의 샘을 길어 올리기 위한 가장 적절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성을 버린 지 오래인 듯한 이들의 모습에서 화자는

 

누구는 인도에서는 모든 사물이 사색한다고 하지만 사상 없이, 아니 의미를 붙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척박함, 비루함이 널려있다.

타인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거나 본 경우, 자신이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 타인을 위험에서 구제해야 하는 의무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다. 선행이 아닌 의무로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착한사마리아인의 법을 시행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이 이곳에서는 무력하다. 돌봐야할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다. 

-<그대 안녕한가>

 

라는 역설적 사유의 두레박으로 샘물을 길어 올린다. 동일한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의 낯섦과 사유의 안과 밖. 여기 바로 소통의 문제가 깔려 있다. 텍스트의 미적 감수성은 같은 사물일망정 화자의 차이에 따라 이렇게 변주되게 마련이다.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직관이 아니라 내적 감각의 차이에서 연유함일 것이다. 연암燕巖은 일방적인 법고와 창신, 이 두 대립되는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었다. 동일한 사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서 소통의 변주를 보게 한다.

 

이런 경향은 <멈춰버린 시계>에서 더욱 체화된다. 일본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에서이다. 시계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02분에 멈춰있다. 돌아보는 화자의 마음 안에 갈등이 인다. 그들의 평화 개념에 대한 반발이요, 비정批正이다. 과도한 의미를 담은 이 평화의 상징이은 평화스럽지만은 않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입구에는 '더 이상 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누구를 향한 참회의 언명인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 2만 여명이 피폭을 당했고, 그중 1만 여명이 폭사했다. 보상 문제에서도 한국인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비참하게 살다 참혹하게 죽은 이들에게 누가 사죄를 해야 하는가. 과잉 진압한 미국인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인가.

원폭으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도 분명 피해자다. 그러나 피해자이기 전에 저 군국주의자들은 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가해자다. 일본은 원폭자료관을 찾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반핵운동과 평화운동의 선두주자로 표정을 바꾸면서 과거사를 오도하고 있다. '반핵' 이전의 '반전'을 모르는 얼굴이다.

 

-<멈춰버린 시계>에서

 

가장 역설적인 평화의 상징물 앞에서 화자는 소통의 문제를 담고 있다. 소통의 변주이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 <인간의 창조>는 위대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문학의 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노정숙은 뛰어난 상상력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좀더 새로운 각도에서 깊고 풍부하게 바라보고 있다. 문학작품은 이렇게 새롭게 현실을 보는 창조적 상상력에서 창작되어야 하지 싶다. 노정숙의 기행수필은 텍스트의 미적 감수성을 통해 소통의 코드로 작용하고 있다.

 

 

5. 나가는 말

 

필자는 이 글에서 노정숙의 기행수필 몇 편을 음미하면서 작품 속에 내재한 세계의 지향을 존재 미학과 소통으로서의 변주로 보고 이들을 철학적 독서로 일관하였다. 이는 타나토스 충동에 기저한 음울한 시대의 포즈를 넘어 한 시대를 읽어내려는 측후법으로 작가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탐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수필에서 구사한 언표들은 몸, 현실, 그리고 담론의 공간이 각별하여 일반적인 기행의 흔적보다는 작가의 내적 감각 일테면-사막과 바람, 신과 죽음, 고려인과 우즈벡인, 전통적 관습과 천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낯선 질료를 통해 사유의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텍스트는 외곽外廓인 언어예술로서의 지배소를 찾게 하며, 언어미학적 측면에서의 존재 미학과 ‘몸’을 통한 소통으로서의 변주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케 하였다. 또한 그의 사유는 우리가 궁극적인 형식으로 삼는 ‘몸’에 대한 문학적 존재 미학이며, 미적 감수성과 소통의 코드로서 작품을 해석하게 하였다. 특히 그의 수필의 지배소는 낯설게 하기에 주효함으로써, 소격疏隔효과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잉가르덴은 문학작품을 계층적 구조로 설명한 바 있었다. 그 첫 번째 층은 이른바 언어적 음성형상의 층이며, 둘째의 층은 의미 단위의 층이고, 셋째는 묘사된 대상성의 층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의 층은 도식화된 시점의 층이었다. 이런 구조적 계층으로 보아 이미 노정숙의 수필의 층은 기행의 전모를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네 번째 완성된 층으로 볼 수 있었다.

끝으로 작가 노정숙이 그의 수필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본격수필로의 다원적 텍스트와 지배소의 존재 미학이 여타 작가들의 창작에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 마디로 그의 수필은 예술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논의에서 어설픈 필자의 철학적 담론으로 그의 수필을 잘못 짚은 오류와 필자의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예외적 가편佳篇들에 대한 해명이 부족했으리라 생각한다. 그 점은 타 평자에 의해 바로잡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한상렬수필가, 문학평론가.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국제펜한국본부 인천지역명예회장.

에세이포레문학회 회장. 『월간문학』, 『수필과비평』편집위원. 계간문예지 『에세이포레』발행, 편집인.

강남문화원 문예창작 지도교수. 저서에 수필선집 《비움과 없음》, 《신화를 꿈꾸다》, 수필창작론 《수필문학 강독》(전3권), 문학평론집 《수필문학의 성쌓기》외 60여 권. 신곡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등 수상.

 

<에세이포레> 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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