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칠부능선 2010. 1. 29. 14:25


 

남자들에게

- 시오노 나나미

 

 

  남편이든 애인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한번 병이 나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아 본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하지만 진짜 병이어서는 곤란하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으로는 이야기가 심각해지니 정말로 바라서는 안되겠지. 감기나 골절쯤으로 해두자.
왜 병이 나 주었으면 하느냐 하면, 병이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 앉지 못할 상태가 되어야 겨우 여자는 남자를 독점할 수 있으니까. 남자란 요상한 동물로 능력 있는 남자란 것과 바쁘다라는 것을 정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바쁘면 바쁠수록 자기가 무슨 ‘대단한’ 남자인 줄 알고, 또 그런 모습을 여자에게 과시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런 남자들은 시간을 내는 것이야말로, 특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시간을 짜내는 것이야말로 남자의 진짜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아무리 설득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인종이니, 이런 인간을 독점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전법을 쓸 수밖에 없다. 병이라도 나게 해달라고 악마에게라도 빌게 된다. 이렇게 하여 억지로 남자를 병상에 눕혀 놓고 보면 의외로 섹시함을 드러내 준다. 적어도 별일도 아니면서 바쁜 척하는 남자에 비하면 훨씬 멋있고 귀엽다.
언제나처럼 별스러운 일도 아니면서 바쁜 척하는 남자도 머리가 좀더 나은 여자가 보면 웃어 버릴 괴상한 짓을 병상에 묶어두면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바쁜 척할 때보다는 훨씬 솔직한 상태가 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병상의 남자를 돌볼 때 평상시보다 무척 자연스러워진 남자를 발견하고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행복한 기분에 젖게 된다.
남자들은 또 보통 때는 용감한 척하는 주제에 일단 병이 나면 엄살을 떤다. 별스런 병도 아니면서 죽지나 않을까 하는 칠칠하지 못한 소리를 입에 담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늘 엄살떠는 남자는 곤란하지만 가끔 엄살을 떠는 것도 귀엽다고 여자다운 여자라면 찬성해 줄 것이다.

이탈리아의 남녀는 극히 자연스러운 인사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직역하면 대강 이렇다.
“저는 당신 희망대로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을 유혹할 때만 쓰는 말이 아니다. 이 말 앞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를 붙여, 그 동안이라면 나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 사이라면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참으로 멋있는 표현이 아닌가. 시간의 제한은 있지만 ‘저는 당신 하자는 대로 하겠다’니 얼마나 관능적인가. 이탈리아어라면 간단하니까 이 정도는 외워 두면 어떨지.
‘소노 투아 디스포지초네.’(Sono tua disposizione)
동양 남자들은 이런 말을 해주지 않으니 병상에 묶어 둘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병상에 누워 있는 한 남자의 자유는 여자 손에 달려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간병에도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보태진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역시 비밀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흉금을 털어 놓은 사이라 한들 절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별스러운 일도 아니면서 바쁜 척하는 남자들은 이런 미묘한 심리를 모르기에 병이라도 나주길 바라다니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자의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남자라면 일생을 바쳐 사랑할 가치가 있다.
사랑하는 남자라는 범위가 아니라도 병상의 남자란 이상한 매력을 풍긴다. 노래도 부르고 연기도 해내는 데이빗 보위를(조금 희한한 매력을 가진 젊은 남자에 지나지 않으나) 안대를 씌워 침대에 눕혀 보면 어떨까. 냉혹한 매력을 풍기는 두 눈을 가리고 말이다. 단정한 얼굴 윤곽이 한층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 섹시할 것 같다. 바꿔 말하자면 움직이고 있는 동안은 별스런 남자가 아니란 뜻이다.
키스 캐러다인(Keith Carradine)은 무슨 병명을 붙여 볼까. 골절이 좋을지 모르겠다. 비웃음과 부드러움을 아울러 지닌 두 눈은 남겨두고 싶다. 그러나 이 남자는 침대에서 움직이지 못해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여자에게 마음이 동요될 남자는 아니다. 그에겐 여자의 헌신이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할 여자는 헌신해 주든 않든 사랑할 것이고, 아무리 헌신적으로 바쳐 주어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는 그 때문에 사랑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여자의 가슴 속을 헤치고 파고들 단어로.
이 두 사람 말고는 왠지 병석에 눕혀 볼 배우가 생각나지 않는다. 역시 매력을 느끼기 못하기 때문이리라.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하고 싶어지는 것은 매력을 느끼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나머지는 지방에 혼자 부임해 가는 남편에게 “부디 건강하세요” 하고 신선하게 배웅할 수 있는 부류에 들어갈지.
도대체 남자들은 왜 바쁘고 싶을까? 아니, 능력 있는 남자가 바쁜 것은 동서고금 예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 여자들은 투덜댄다. 바쁜 중에도 여자를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지 않느냐고. 그것 또한 능력의 하나가 아니냐고. 병이 나길 원하는 것도 그런 자상스런 마음이 없는 남자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 낸 한 꾀에 불과하다.

한 예를 소개하고 싶다. 내가 10여 년 전에 어느 잡지 연재를 맡아 이탈리아를 여러 방면으로 소개할 때였다. 그 일 때문에 이탈리아 정치가들과도 많이 만나게 되었으니, 그 중 한 사람과는 인터뷰가 아닌 때에도 자주 만났다. 이 정치가는 당시 재무부장관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으나(이탈리아에서는 재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재무부장관과 예산부장관 둘이 있다) 그 얼마 후 수상이 되었다. 수상이라면 아무리 라틴 근성의 이탈리아라고 할지라도 그 바쁜 정도가 판이하게 바뀌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전에는 한 시간정도 수다를 떨 수 있었으나 수상 취임 후에는 삼십 분이 되었고, 어느새 십 분이 되어버렸다. 이에 내가 불평한 적은 없다. 무명작가를 위해서 단 십 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지 불평할 처지가 못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이탈리아 수상이 나를 위해 내어 주는 십 분의 내용이 바뀌었다. 장소는 수상이 되기 전처럼 그의 개인적인 오피스에서 만났지만, 나와 만나는 십 분 동안은 전화를 일체 연결시키지 않았다. 나는 VIP라고 불리는 속칭 어르신네와 만날 기회가 적지 않으나 그들의 오피스에서 만나는 것은 무척 싫어한다. 아무튼 끊이지 않고 걸려오는 전화로 대화가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야 흥이 날 리가 없다.
그것이, 이 이탈리아 수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대화중에 전화를 일체 연결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예외는 있었다. 그것이 무슨 전화인지 몰랐으나, 나중에야 알고 감탄했다. 쿠데타나 혁명, 아니면 대재해의 경우 내무부에서 직접 올라오는 전화선이었다. 그 외에는 장관급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단 십 분간의 대화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서야 누가 불평하겠는가. 시간이야 십 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십 분간은 완전히 내 것이다. 이 정치가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단 십 분간은 지진이나 테러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누구도 방해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이 정치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밝힐 수는 없으나, 아직도 크게 활약중이다. 그는 결코 미남이 아니다. 추남이라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여자를 이렇게도 관능적으로 다룰 줄 아는 남자는 용모의 미추를 넘어 섹시하게 보인다. 매력 있는 남자다.
아마도 이 이탈리아의 정치가는 나에게만 그렇게 대하진 않았으리라. 나 이외의 여자, 아니 여자만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그렇게 대했음에 틀림없다. 바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바쁜 중에 단 십 분이라도 상대방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은 충분히 ‘멋있는’ 남자의 능력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정치가가 그의 정치 생활 사십 년 동안 몇 번인가의 침체기가 있었으나 곧바로 다시 부상하여 늘 제일선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소개한 그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만이 그의 능력인 것은 물론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효용이지 않았을까. 인간은 어차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성립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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