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패자의 기록

칠부능선 2007. 3. 21. 18:39
 

                            패자의 기록



 

  아르코 회관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라고, 패자의 구구한 변명과 참회의 기록이 문학이라고 한다. 글을 좀 못쓰는 것도 ‘선행’이라고, 그래야 잘 쓰는 사람이 돋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시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별 볼일 없는 자기 같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이며, 시가 돈이 된다면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에서 다 차지했을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 한바탕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 바람이 인다. 어쩌면 문학은 최대의 노력으로 최소의 효과를 거두는, 경제논리를 무시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겸손으로 포장했지만 자조 섞인 쓰린 속을 왜 모르겠는가.

  문학은 사회를 반영하는 척도다. 사회의 변천사는 문학의 언저리를 밟아가다 보면 그 시대상이 드러난다. 시대를 앞서갈 혜안이 없는 요즘, 선정적이거나 엽기적인 것이 유행인 듯 반짝 인기를 누리고 있다. 사유의 깊이보다 속도의 경쟁이 우선한다. 사이버 문학공간이 새로운 운동 공간이 되었다. 이는 일방통행이던 종이 매체의 한계를 넘어, 쌍방소통을 하면서 급진적으로 발전한다. 하나하나의 목소리가 모여져 제도권에 대한 발언도 강해진다. 익명성의 보장으로 감정적이고 거칠어지기도 한다. 정보의 바다에는 쓰레기도 많아서 고도의 낚시 기술이 필요하다. 얼굴 없는 네티즌은 새로운 세력이다.

  문학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만들어낸 세계로 향하기도 하고,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일상의 경험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문학이 실용의 옷을 입건, 참여의 빛을 띄우든 자유로울 때만이 우리를 위로한다. 너무 큰 목소리는 거부감을 주지만 나름대로의 치열함을 산다.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억지로 못질을 해서 나무를 잇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귀를 맞추어 균형과 조화로 완성에 이른다. 좋은 글은 이미지와 리듬이 자석처럼 서로 끌고 당기며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무엇인가를 알려 주려한다든지, 훈계를 하려는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중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스며든다.

 

  내 방 책상 앞에는 장인숙 화가가 그린 자작나무의 사계가 있다. 한동안 들여다보면 어느새 그림 속으로 빠져든다.

  숲이 잠에서 깨어난다. 아슬한 봄볕인가 어린 자작나무 눈 속에 감춘 발을 털며 일어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은 팔 벌려 소곤대며 눈 맞춘다. 속이 들기 이른 자작나무들은 설렘으로 실바람에도 목을 세운다.

  샤모니의 자작나무는 겨울의 한가운데서 맑은 정신을 드러낸다. 눈 덮인 먼 산을 배경으로 잘 생긴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이국적 분위기의 자작나무에는 반음이 없는 악기에서 무리하지 않은 반음의 연주를 듣는 여유로운 멋이 있다. 그의 그림에서 치열함을 안으로 삭인 무르익은 정서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심을 느낀다.

  북구의 옛 사람들은 병이 나면 식사 양을 줄이고 숲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나는 마음에 병이 찾아오면, 버릴 것 다 버리고 의연히 서있는 황혼의 빛깔로 빛나는 가을의 자작나무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혼란으로 시끄러운 머리가 맑아지고, 허망한 욕망으로 애타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 때까지 바라본다. 어느새 그의 그림은 나를 치유한다. 


  나는 어린 날 꿈속에서 자주 날았다. 유체이탈처럼 몸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순간 발을 살짝 들면 둥둥 몸이 뜨는 것이다. 단숨에 가벼워진 몸은 산과 들을 거침없이 날아다녔다. 둥근 산 아래 작은 마을을 바라보며 가만히 슬퍼지기도 했다. 늙은 엄마가 슬프고, 언니가 없어 슬프고 너무 조용한 집이 슬펐다. 어떤 때는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놀라서 깨어보면 베갯잇이 다 젖기도 했다. 깨어있던 나를 슬프게 하던 것은 해질녘 노랗고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집집에서 피어오르던 굴뚝연기였다. 하얗게, 혹은 진회색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다 바람결에 따라 일제히 춤을 추듯 몸을 비트는 것을 보면 괜스레 슬펐다. 머리 푼 연기가 하늘로  하늘로 퍼져서 기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슬픔은 극에 다다랐다. 노을은 왜 그리 불러대는지, 오랫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면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매캐한 연기 내음을 핑계로 눈물을 좀 흘려도 좋았다.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언제나 자유롭고, 하늘을 날던 꿈속 기억은 넉넉하다. 굴뚝연기의 전언에 귀 기울이며, 아득하게 즐기던 슬픈 감상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내 문학의 바탕은 성글어 내일을 내다보는 혜안이 없다 해도 그만이다. 조각 기억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풀어놓는다. 무엇이 되지 못했던 말들을 통회한다. 쓰는 중에 느끼는 자위의 착각도 즐긴다. 그러나 사실,  위로는 순간이며 고통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 일에 목을 매고 있는가. 통증을 호소하는 어깨에 눈치를 보며 계속 혹사시키고 있는가. 겸손한 시인이 말하는 ‘선행’에 잠시 위로받기도 하지만, 속내는 끊임없이 선행을 거부한다. 자작나무에서 위로받는 그 어떤 것에 이르는 날까지 계속 쓸 것이다.

  오늘도 A4용지 위에서 염치없는 비상을 꿈꾼다. *

 

 

 

 <수필시대> 3/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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