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불안

칠부능선 2007. 2. 10. 23:17


                       불안은 …




  ‘불안은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죄에 가까이 가 있다는 것, 

‘생각’ 까지도 죄의 범주에 넣는 도덕성으로 본다면 그 무거운 부담감은 경고의 의미다.

  

  며칠 전, 의사가 오빠에게 더 이상의 역할을 포기하며 ‘준비’를 시켰다. 

폐에 필요 없는 물이 차고 신장이 제 기능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라는 말인가. 보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한 번 더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  작별 인사 할 여유를 준 것에 감사를 해야 할까.  상상을 초월하게 발달했다는 의학도 지금은 먼 나라의 이야기다.

 

  아쉬움 없는 생이 어디 있을까. 

아직은 아니라고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쉽게 손놓을 수 없는 이 땅에 미련이 많다. 

순서대로 갈 수 있다면 공평할까. 

아까운 사람을 먼저 데려 가신다고 그 곳에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위안을 해야 할까.

  어디에 뜻이 있을까.

  인간인 의사가 생과 사를 어찌 결정할 수 있는가. 

몸 속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나빠져서 고칠 수가 있고 없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용기가 허공을 떠돈다.

  인체의 신비를 벗기는 게놈 프로젝트는 DNA염기서열을 이미 97%이상 해독했다. 

머지않아 인간 게놈 지도 완성으로 인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유전공학을 통해 유전자 치료로 불치병을 없애고 우생학적 유전인자만 취한다면 어떤 세상이 올까. 

유전자를 선택하는 세상에서 연기론이나 숙명론은 이제 무용지물이다.

 

  생물학적 진화에 따르지 못하는 도덕적, 윤리적 진화가 우리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도 아직은 풀어야 할 과제다. 

진화된 문화생활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기본 질서의 진화,  아직도 어지러운 이 땅이 나는 두렵다.

  우성인자만을 지닌 인간이 얼마나 행복할까. 이미 낮아지는 범죄 연령, 무너지는 공교육, 붕괴되는 가정, 불안이 도처에 널려있다.

게놈 지도 완성으로 인간이 동물을 구분 짓는 명확한 요소를 찾을 수 있을까. 

인간만의 지적활동과 자유의지를 밝혀낼 수 있을까.

  나는 알고 싶지가 않다 내 속의 상태를 알고 난 후의 두려움에서 그 혼란에서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렇게 소상히 알아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몸 안의 병을 미리 알아내서 얼마간의 고통을 마비시켜 줄 수 있고, 기간을 조금 지연시킬 수는 있겠지만 허망한 일이다. 작고 작은, 불완전한 인간으로 어딘가 보이지 않는 절대의 힘에 기대고, 숙명으로 돌리며 체념도 하고 때로는 위안도 하며 그렇게 사는 것이 나는 좋다.

 

  인간의 생과 사는 운명이나 어떤 뜻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는다. 부주의한 죽음은 없다.   

내 노력 없이도 내 안의 세포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간염균과 싸워서 이미 항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내 안에서는 작은 혹이나 종양들이 생겨났다가 소멸되기도 하고,

내가 눈치 채지 못 하게 느린 속도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속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부처의 시각에서 육신은 상처와 같이 보호해야 할 대상일 뿐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언젠가는 벗어 놓아야 할 옷과 같다. 낡아서 떨어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영화 ‘약속’에서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 자신의 죄를 대신에서 잡혀있는 부하를  위해 자수하러 가는 애인을 말리는 여자에게 말한다.

  “하느님은 내 병을 낫게 해 줄 수는 있지만 나를 대학에 합격하게 해 줄 수는 없어. 그건 죄 없는 한 사람을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이지.”

  내 노력, 내 믿음으로 가능한 일과 가능하지 않는 일을 구별하는 기준이 명쾌하다.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은총의 역사를 가볍게 말한다.

 

  언제든 희망은 있다.

  10살 차이나는 막내 오빠, 아버지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아 그리움에 젖게 하는 오빠,

세대차이 모르는 감각으로 내 이상형의 남자였다. 순한 성격에 정이 많아서 지금도 온 집안의 소식통이다.  이제부터 오빠의 투병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의사의 권고대로 신경 쓰는 일 하지 않고 적당한 운동을 하며 절대자의 힘에 기대고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마음이 따뜻한 오빠가 신경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이 가장 어려울 것 같다.  주위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는 즐거움이 큰 사람인데, 그 생활 방식을 바꾸기가 쉬울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잠시 왔다 가는 길목일 뿐,

죽음은 인간이 영원한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기쁜 일인데 이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이율배반이기도 하다.  지금은 수용할 수 없는 많은 이유도 긴 시간이 지나면 그 속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 몫의 고통을 묵묵히 견디는 순명의 자세는 어여쁘다. 

  억울함이 아닌 넉넉한 나눔의 삶이기를, 준비가 필요 없는 오늘이 마지막 날과 같은 절절함을 매일 담을 수 있기를 꿈꾼다.  작은 일에도 흔들리며 불안한 마음을 가까이 두고 있는 나는, 이 불안이 누군가가 내게 보내는 관심과 배려로 알고 즐길 것이다.

 

  오빠의 마음 속에도 있을 ‘불안’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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