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미나리
강정숙
사는 게 늘 뻘밭이기만 했을까
가늘고 여린 허리로
주춧돌을 세울 때도 있었지
그런 날을 견디느라
저 작은 잎들은 부신 빛을 끌어들었지
전원주택 단지인 그 동네 언덕 아래
오래된 집 납작한 단칸방에서
낡고 얼룩덜룩한 벽지를 뜯어내고
눈꽃같이 포근한 벽지로 되배될 방을 꿈꾸며
겨울이면 따스한 불빛의 전구를 달고
여름이면 작은 선풍기를 돌려 바람을 안아 들이던,
길가로 난 작은 창엔 사철
수런수런 발걸음 소리,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들창을 닫아건 뒤
불 탁 끄고 잠자리에 들 때의
그 아늑하고 달콤했을 사랑의 정처
그리하여 파릇한 새 계절 오면
몸에 물 올리고 향내 들였으나
고인 물속 거머리 떼 장딴지에 기어올라
새빨갛게 피 빨리고
속잎 누렇게 떠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던
그 아픈 시간도 거치면서
질기게 살아낼수록 더 향기로워지는
나도 한때 그런 황홀한 미나리였지
- [문학의 오늘]2022 봄호, 이계절의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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