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산밤 / 허정분

칠부능선 2021. 5. 12. 16:29

산밤

 

 

겨우내 먹겠다고 욕심껏 주워 온

눈에 띄는 대로 수탈의 표적이 되어

김치 냉장고서 겨울을 난 산밤을 깐다

미라처럼 생이 정지된 어리고 말랑한

밤벌레의 주검

어느 모태가 슬어 논 유전자의 보금자리였을까

한 생을 일용할 약식이었건만

서서히 굳어가는 추위와 맞서

굴을 파고들며 버티던 생애도

비정한 추위 앞에서는 다 무용지물이었듯

썩어서 먹을 수 없는 산밤 내다 버리며

소나무 먹는 송충이나 밤을 먹는 밤충이나

헛 욕심에 눈먼 나도 식충이처럼

평생을 먹거리 포로로 끌려간다는 생각에서

오싹 전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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