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 이병률

칠부능선 2018. 6. 23. 22:54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이병률



늦은 밤 술집에서 나오는데 주인 할머니

꽃다발을 놓고 간다며

마늘 찧던 손으로

꽃다발을 끌어안고 나오신다


꽃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신(神)에게 가겠다고 까부는 밤은

술을 몇 잔 부어주고서야

이토록 환하고 착하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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