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노정숙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굴이 하얀 의사는 살짝 미소까지 띠며 말한다. 지금 내 심장의 상태는 빈혈이 심해서 내가 편히 누워있을 때도 100미터 달리기 중이라고 한다. 내 혀가 달큼한 유혹에 노닐고 내 눈이 깜빡 즐거움에 빠진 시각에도 심장은 저 홀로 숨이 가빴던 것을 왜 알아채지 못 했는지. 막연히 불안했던 게 그것이었단 말인가. 당장 아침저녁 밥상에서 작은 당의정 한 알을 삼켜야 한다.
느닷없는 하혈도 대수롭지 않게 시침 떼고, 주변이 자주 흔들리는 것도 묵살했건만 건강에 있어 과신하는 내 오만이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빈혈약을 먹는 것은 임시방편이고 빈혈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몇 가지 검사 후에 어렵지 않게 산부인과에서 원인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속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의사는 친절하게도 모니터를 지시봉으로 짚어가며 지름이 얼마라고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내 자궁에서 혹이 자라고 있다. 더 이상 생명을 만들 기미가 없으니 심심했나보다. 아기 주먹만 한 것이 하나, 그 건너편엔 올망졸망 자잘한 것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이들이 왕성하게 움직여 피톨들을 흘러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몸에서 가장 둔하다는 자궁이 발칙하게 내 양해도 없이 영양가 없는 살덩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영양가 없는 것을 키우는 건 내 습성을 닮았다. 생산성 없는 일에 몰두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의사는 당장 수술 날짜를 잡자고 한다. 다른 방법을 물으니 폐경에 이르면 저절로 해결이 된다고 한다. 그 때가 되면 호르몬이 활동을 그치기 때문에 이들 역시 잠잠해 질 것이라고 한다.
“신이 우리를 길들이는데 채찍을 사용하지 않고 시간을 허락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은 시간 얼마간의 고통은 쾌히 감내하리라.
요즘은 폐경을 완경이라고 한다나. 무엇을 완결했다는 것인가. 완결이란 내 생에 어림없다. 그저 한가롭게 문을 닫을 뿐이다. 늘 능동에 이르지 못하고 자주 한눈을 판 몸, 제대로 써주지 못한 몸에게 뒤늦게 미안하다.
스위스 출신의 누드 첼리스트 나탈리 망세는 첼로에 대한 클래식 음악의 고전적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파격을 택했다. 자유로움의 상징으로 일체의 틀을 거부한다. 그의 첼로는 인디안 타악기와 한 몸으로 섞이고, 랩 비트와 결합하기도 하며 록(rock)을 연주 한다. 어떤 장르와도 넘나들며 소통한다. 첼로와 하나가 된 그의 몸이 첼로를 빛나게 한다.
내가 몸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몸의 신음조차 등한시하며 매달린 것은 무엇인가. 깊지도 넉넉지도 못한 머리를 구슬려 가며, 기껏 풀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이 누군가에게 한 순간일지라도 공감과 위로가 되고 있는가. 그 시답잖은 결과물들을 돌아보니 생각만 무성하고 한 번도 몸으로 치열해 보지 못한 것이 새삼 부끄럽다.
자유로운 몸은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나는 내 몸보다 남의 몸에, 남의 혁신에 넋이 나가있다. 그의 누드 연주에 대해 논란은 당연하다. 기존 질서를 벗어난 새로운 것은 당혹스럽고 거북살스럽다.
그가 연주하는 ‘천사들’에서는 평화의 냄새가 난다. 감미로운 선율과 관능미 넘치는 몸에 흠뻑 빠지고 남은 것이 평화의 냄새라니…. 그는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옷을 벗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해방감을 위해 벗은 것이다. 벗은 몸의 자유로운 느낌이 전해오며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가 추구하는 개혁이 첼로 음악의 대중화라고 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첼로와 한 몸이 된 나탈리 망세처럼 나는 수필과 언제 한 호흡을 했는가. 수필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 ‘나’ 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객관화시키려고 궁리하며 나를 장식해 줄 그럴듯한 옷을 찾지 않았는가.
글은 나를 쉼 없이 채근한다. 좀 더 재미있게! 좀 더 실감나게! 구호를 붙이며, 눈치 보지 말고 다 벗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주문사항이 늘어날수록 머릿속은 아수라장이다.
서툴게 분칠한 얼굴에 누가 눈길을 주겠는가. 어쩔 수 없이 꾸밈없는 맨얼굴로 마주서야 한다. 언제쯤이나 이 시대와의 불화를 능청스럽게 말 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나 내 깊은 진창의 사금파리를 웃으며 꺼내놓을 수 있을까. 익숙해져버린 진부와 통속을 벗고 어서 가벼워져야 한다. 자유도, 새로움도 확보하지 못한 내 글에게 미안하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몸이라는 공식을 내려놓는다. 몸이 좀 아프다 해도 정신이 강건해서 그것을 무시해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도 자만의 소치임을 이번에 되게 앓으면서 알았다. 이제는 ‘죽음이 있어 다행이다’고 쉽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발 빠른 말보다 어둔한 몸이지만 나는 몸을 믿는다. 몸으로 새긴 기억이 오래 남는 법 - 복선을 깔아야 안심되는 머리보다 감성만 난만한 가슴보다 느낌으로 내달리는 몸은 정직하다. 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출산의 욕망을 버린 지 오래다. 이젠 바닥에 남은 모성성의 징후마저 말끔히 거두어야 한다. 그러나 시시로 들끓는 이 욕망을 어쩌랴. 몸은 어서 닫으라는데 실바람에도 귀가 선다.
|작법공부|
① 이 작품은 ‘첼로와 한 몸이 된 나탈리 망세처럼 나는 수필과 언제 한 호흡을 했는가.’라는 주제를 몸 이야기를 비유적 상관물로 삼아 형상적으로 주제를 풀어내고 있는 산문수필작품이다. ‘몸의 신음조차 등한시하며 매달린’ ‘몸의 말을 들어야 한다.’
② 필자는 이 작품이 주제를 풀어내기 위한 비유적 상관물로 몸 이야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무란 무엇인가, 할 때 우리는 나무의 정신이나 감성을 생각하기 전에 나무라는 물질적 사물 대상의 모양을 머리에 떠 올린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란 무엇인가 할 때도 정신이나 감성을 생각하기 전에 짐승과 다른 사람이라는 존재의 모양을 생각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게 되면 하나같이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정신적 존재 혹은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이가와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양대 문제에 대한 이해와 답변은 이 같은 갈등 속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이 인류의 정신문명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서 예술은 끊임없이 몸을 소재로 삼아 왔다. 특별히 그림과 조각은 인간의 몸을 예술창작의 중심 소재로 삼아왔다. 근대의 소설문학은 회화와 조각에 뒤질세라 인간의 몸의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기존의 수필론에서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수필은 시나 소설에 비해 그 형식이 매우 자유롭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필은 어떤 소재든지 다룰 수 있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천편일률적으로 그 형식이 조잡한 것이 수필이고, 그 소재 또한 천편일률적으로 신변잡사 일색인 것이 수필이다. 그 중에서도 기존의 수필이 가장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는 것이 ‘몸’에 관한 이야기이다.
‘몸’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고,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탄생에 관한 이야기이고,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노정숙의 「몸」은 기존의 수필에서 침묵하고 있는 몸 이야기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그 점만으로도 스스로 기존의 수필이 아님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이 몸 이야기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뜻은 몸 이야기라면 하나같이 점잖들을 떨고 있는 수필계에서 남자의 몸도 아닌 여자의 몸을 벗겨내고 있다는 점이 그 첫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여자의 몸 중에서도 다른 부위도 아닌 여성성의 근본이 되는 자궁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화자는 ‘몸에서 가장 둔하다는 자궁이 발칙하게 내 양해도 없이 영양가 없는 살덩이(혹)를 키우고 있었다’고 나무란다.
그러나 그 나무람은 내 양해도 없이 영양가 없는 혹을 키우고 있는 자궁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가 몸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몸의 신음조차 등한시하며 매달린 것은 무엇인가’라는 저 지구촌에서 가장 잘난 체 하는 ‘정신머리’라는 것을 향한 회초리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작중 화자 한 사람만이 맞아야 할 회초리질인가? 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 철학과 대한민국의 기존의 수필이 함께 맞아야 할 회초리질이 아니겠는가?
“벗은 몸은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첼로와 한 몸이 된 나탈리 망세 처럼 나는 수필과 언제 한 호흡을 했는가.”
왜 기존의 수필은 시, 소설, 희곡, 연극, 영화, 미술, 음악과는 달리 몸 이야기, 즉 사랑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하지 않는 것인가, 할 줄 모르는 것인가? 필자가 알기로 기존의 수필은 몸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1세기 동안 기존의 수필은 예술론의 본질인 창작론과 전혀 접촉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한 기존의 수필과 창작문예수필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기독교 최초의 이단설은 몸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지 않고 영으로만 왔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몸은 부정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격화 할 것은 더욱 아니다. 몸의 의미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존재하는 양상에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몸을 입음으로서 생영이 되었다고 하였다.(구약성서 창세기 2장 7절) 사람이라는 피조물의 존재하는 양상이 몸에 있다는 뜻이다.
필립 시드니는 창작이라는 poesis의 원의인 ‘만들다’라는 말을 기독교적 창조론의 의미로 해석하였다.([문학이론의 역사적 전대] 이상섭 135쪽)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문예창작론이라는 시각에서 참조 할 수밖에 없는 말일 것이다.
문학은 사람이 사는 모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 사는 이야기의 중심은 사랑 이야기에 있다. 사랑이야기는 몸이라는 밭에서 시작된다. 사람 사는 모양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문학이 될 수 있겠는가?
에로스 없는 아가페는 있어도 에로스를 모르는 아가페는 없다. 성경은 에로스 이야기를 통해서 아가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에로스를 모르면 아가페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러므로 창작문예수필은 다른 모든 예술 장르처럼 몸 이야기, 즉 사랑 이야기를 작품 소재의 중심에 들여놓게 될 것이다. 이것이 또한 기존의 수필과 창작문예수필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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