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골목
노정숙
몰타의 옛 수도 엠디나는 거대한 성벽이 첫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요새의 외벽이 벗겨져 화석처럼 켜를 이루고, 성벽 아래는 포탄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미황색 석회암 건물들이 그림으로 보던 중세의 모습 그대로다. 네모진 돌이 쪽고르게 깔린 거리는 미끈하고 깨끗하다.
여행객을 위해서 곳곳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양쪽 눈 옆을 가리개로 가린 말을 보니 마차를 타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 안전을 위한 조치겠지만 사람이나 동물이나 앞만 봐야하는 건 답답한 노릇이다. 나를 사방지기로 풀어놓고 싶어서 떠난 여행길이 아닌가.
성 바울 성당에서 결혼식을 보았다. 흰 드레스를 입은 앙증맞은 아이가 앞서고 좀 나이 들어 보이는 신부와 신랑이 뒤를 따른다. 킬힐에 어깨를 다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여자, 향기가 날 듯한 강렬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 긴 머리를 묶고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축하객들의 차림새가 눈길을 잡는다. 설렘이 눈으로부터 시작한다. 장 베르동의 『중세의 쾌락』에 보면 엄숙한 미사 중에도 짧은 눈맞춤이 오가며 사랑, 혹은 정욕이 시작되었다. 중세 기독교는 천상에서 누릴 행복을 약속하며 금욕생활을 강요했다. 즐거움을 쫒는 것은 악마의 짓이며 육체의 괘락을 추악한 죄악으로 몰았다. 부부관계 체위까지 규제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랑을 죄악시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인들은 줄기차게 신 앞에서 언약을 한다. 통제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엠디나는 광장과 이어진 골목이 압권이다.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 전략적으로 만들었다는 골목은 마냥 자유로워 보인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여유롭게 지나는 곳도 있고, 혼자 겨우 빠져나가는 골목도 있다. 좁고 느린 골목의 커브를 돌때마다 기대감으로 눈이 커진다. 돌다보면 고풍스러운 공동우물과 긴 의자가 놓인 넓은 터도 있다. 돌출된 발코니에서 고개를 내민 꽃들이 재재거린다. 진홍색 부겐빌레아는 낡은 벽의 권태를 깨우고, 좁은 골목의 담 허리를 파서 만든 꽃밭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작은 화분에서 벽을 타고 오르는 초록 넝쿨이 우렁우렁하다. 사방 어디를 찍어도 작품이다. 배우 현빈이 광고를 찍었다는 황량한 골목에 이르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고 싶다’던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높다란 벽이 은밀한 이야기를 모두 덮어줄 것 같다. 이루지 못한 일이나 잡을 수 없는 건 모두 애달프다.
이곳 사람들은 시에스타를 철저히 지킨다. 강렬한 햇살 아래서 맑은 정신을 챙기기 위해서 중간 휴식이 필요하다. 내게도 그늘 속에 침대가 있다면 바로 달콤한 잠에 빠졌을 게다. 사람 기척 없는 골목을 여행객들만 슬렁거리고 있다. 담이 만들어준 그늘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개와 고양이들도 한가롭다. 담 아래쪽 철망 속에 자물쇠가 잠긴 가스통만이 지금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엠디나에서 유명한 카페 폰타넬라에 갔다. 오렌지가 든 바구니와 꽃이 가득한 마당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니 길게 놓인 테이블에 사람들로 왁자하다. 산이 없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인 것 같다. 멀리 세인트폴 성당과 몰타 섬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무너진 회백색 건물들 너머 지중해가 하늘과 손잡고 있다. 건너편 테이블에 한 쌍의 남녀가 포개어 있는 모습도 어여쁘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쉽게 하는 이는 모두 아름답다. 시원한 맥주와 피자로 요기를 하고 나니 이곳의 시간처럼 마음도 느긋해진다.
광장을 걷다가 고문할 때 쓰던 십자 모양의 형틀을 보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교도를 박해하던 마녀사냥이 떠오른다. 여자의 몸을 죄악시하던 참혹한 시간이었다. 나무로 만든 그 틀에 머리와 두 손을 넣어본다. 나무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다. ‘지금까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모두 사하여 주세요’ 주문을 한다. 이국의 형틀 앞에서 난데없는 간절함으로 잠시 숙연해진다. ‘사는 게 다 죄입주게’ 하던 제주도 고해소에서 들은 말이 떠오른다. 죽음만이 죄 없는 세상으로의 입성인가. 살아내는 것이 모두 죄짓는 일이라고 해도 어쨌거나 오늘 감사하고 지금 기쁠 것 - 내가 믿는 종교는 현세의 화평에 있다.
몰타는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다. 아프리카 북단에서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아랍, 비잔틴, 노르만의 침략을 받고 로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침략자가 바뀌면서 그들의 문화가 덧입혀져 건물은 로마네스크, 바로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공존한다. 1964년에서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서 1974년에 몰타공화국을 성립하고 지금은 EU회원국이다.
성채도시 엠디나는 천 년 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이어온 7천년 역사, 일찍이 빗장을 열고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강해서 부러져버리는 결기決起보다 결 따라 휘일 줄 아는 골기骨氣가 역사를 이끌어간다.
어디를 가도 막다른 곳이 없는 엠디나의 골목, 골목 끝이 환하다.
<에세이문학> 2017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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