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부부 진혼곡 + 단평 (한상렬)

칠부능선 2016. 11. 29. 20:08

    

        부부 진혼곡

  노정숙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의 당부는 집에 계시는 ‘아버님께 잘 해주지 말라’는 것이다. 기본만 대충 해드리라고 한다.

나쁜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기억을 떠올려 보라고 권해도 소용이 없다. 한때 아버님의 실체 모르는 바람이 어머니께는 요지부동의 상처가 되었다.

천하의 한량이던 친정아버지는 이와 반대로 돌아가실 때까지 세 여자에게 공경과 사랑을 받았다. 친정 엄마는 시앗을 둘이나 보고도 아버지를

극진히 대했다. 그들도 앞앞이 만났으면 대접받고 살 인물과 솜씨라며 안쓰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엄마의 깊은 한숨소리를 간간이 듣긴 했지만,

아버지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오히려 오빠들에게 아버지 제사상 챙길 생각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좋아하는 술상을 한 번 더

봐드리라고 했다.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며, 아버지의 처신은 어떤 것인지 나는 어려서, 아니 다 큰 지금까지도 가늠할 수가 없다.

친정아버지는 시대와 아내를 잘 만나 남자 중의 남자로 맘껏 살다가셨다.

시어머니는 깔끔하고 자존심 강한 성격에 가족의 서운함이나 험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남들과는 물론이고 형제들이 모였을 때에도 맏언니의 품위를 놓지 않았다. 곱고 단정한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분위기다.

반면에 친정 엄마는 수더분하여 이웃과 형제, 친척들 가운데 있었다.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할머니와 화평하게 지냈다.

양조장의 안주인답게 술도 음식이라며 할머니와 함께 자주 즐겼다. 사람들은 엄마에게 세상사를 의논했고, 아버지까지도 엄마를 누이나

어머니쯤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지금도 이해 못할 건 엄마의 드넓은 오지랖이다. 엄마의 바람은 ‘조용한 평화’였을 것 같다.

시어머니는 무구하고 나는 구구하다. 친정엄마가 바다라면 나는 접시 물이다.

 

  평생 변하지 않는 부부도 있다. 『철학이야기』를 재미있게 쓴 윌 듀랜트는 13살 연하인 제자와 사랑에 빠지고 훗날 결혼했다.

제자의 이름은 에이다 코프먼이었는데 결혼 후 남편이 부르던 애칭인 에어리얼로 개명했다. 아내의 도움을 받아서 많은 책을 썼고,

『루소와 혁명』으로 아내와 공동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981년 10월 25일 에어리얼이 죽자 듀랜트는 식음을 전폐하고 11월 7일에 죽었다.

부부의 동지애적인 막강한 사랑은 죽음마저 함께했다는 생각이 든다.

윌 듀랜트가 죽기 전까지 쓴 방대한『문명이야기』에는 문명은 공동체 생활을 위해 만든 미덕이며 그것이 문명의 시작이라고 한다.

‘남자는 대단히 빛나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자궁이며 인간 종족 주류의 여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존재다. …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 문명화되었다.’ 책 곳곳에 망치가 숨어있다. 무기가 될 만한 두께 값을 한다.

동양의 문명이 그리스, 로마 문화의 배경과 토대가 되었다는 듀랜트는 일찍이 스스로 문명화된 남자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명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인간은 서로가 가진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피식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났다.

착각을 존중해야 할 의무, 내 확고한 생각도 상대가 보면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들 제 멋만 알고 사는데, 이런 마음을 바닥에 둔다면

무엇이 걸리겠는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부부애의 근원이다.

미덕을 전한 그는 오래 남을 것이고, 미덕이 버거운 나는 이내 흐른다.

 

  오래 전, 단독주택에서 집을 팔고 이사 가기 전날에 아버님은 이사 올 사람을 위해 깨진 유리창을 바꾸고, 깜빡거리던 전구를 갈아끼웠다.

얼마 전에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고 가해자가 어려워 보인다고 치료를 자비로 했다. 아버님은 남에게는 배려가 많고 한 치의 불편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어찌 어머니께는 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다정한 손길과 애틋한 마음을 저축해 두지 못하셨는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남녀는 근원이 다르고 그 취향과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오죽하면 화성남자와 금성여자로 비유했을까.

그 거리를 멀찍이 둔 건 본성의 차이를 간파한 것이다. 가정에만 충실한 어머니와 밖으로만 향하는 아버님의 다른 가치가 의견 차이에서

성격 차이로 이어졌을 듯하다. 그러나 친정아버지와 엄마는 밖으로 향하는 생각들이 어느 정도 비슷했던 것 같다.

부부를 지켜주는 건 지난 시간의 열렬한 사랑이 아닌, 서로를 향한 측은지심이다.

함께 일하며 늙어가는 소의 잔등을 쓰다듬는 농부의 손길처럼 애잔한 마음이다.

거부할 수 없는 가족력이 내 몸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흉보면서 닮는 부전자전도 대비해야 한다.

지금 기운찬 계절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떤 바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겨울 초입이라서 좋다.

믿음은 부부의 주춧돌이며 욕망은 디딤돌이다. 그러나 맹목의 믿음과 넘치는 욕망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한 생을 살다보면 누구든

바람에 휩싸일 수 있다. 새뜻한 바람으로 자기를 굳세우며 성장시킬 수도 있고, 허황한 바람으로 재산과 사람, 명예까지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람 없는 세상은 또 얼마나 싱거울까. 적당한 바람은 뿌리를 굳건하게 한다.

부부는 제각각 흔들리며 같은 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예비 연리지다.

 

<한국산문> 2016,  12월호

 

 

 

---알베레스는 "수필은 지성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 이미지의 문학"이라고 했다. 여기에 수필의 묘미가 있지 않나 싶다.

--- "모든 문학은 주정적 경험의 표현이다. 이는 최제서의 <문학의 속성>에서의 언명이다. 그렇기에 수필은 서정을 위주로 서사적 표현일 때

의미의 극대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수필은 서정과서사, 정서의 지성화와 지성의 정서화를 필요로 한다.

 

---노정숙의 <부부 진혼곡> 역시 정서의 지성화를 이룬 작품이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화자로 짝 지어진 이 수필은

"시어머니는 무구하고 나는 구구하다.

친정엄마가 바다라면 나는 접시 물이다." 라는 의미화를 중간에 배치한 병렬구성을 택하고 있다. <<철학이야기>>를 예시로 하여 '평생 변하지 않는

부부'의 삽화는 '진혼곡'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표제와 어울려 서정적 효과를 도와준다. 결미의 "믿음은 부부의 주춧돌이며 욕망은 디딤돌이다.

그러나 맹목의 믿음과 넘치는 욕망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한생을 살다보면 누구든 바람에 휩싸일 수 있다."는 화자의 언술에 귀 기울이게 한다.

- 한상렬 (문학평론가)

 

 

 

<한국산문> 2017년 1월호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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