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숙의 <바람, 바람> 12
겨울 채비
지나온 길 위에 떨어진 흔적을 보네
때로는 꽃보라로
때때로 풋이파리로
이따금 가시를 흩뿌리며 겨우 섰네
몸체보다 깊은 뿌리를 위해
땀과 눈물과 열정을 쏟아 부었지.
벌 나비 새는 정겨운 벗
살가운 훈기로 속살을 오르게 하고
강풍과 폭설은 고마운 벗
무딘 정신을 깨우고 굽은 등을 펴게 하네
자주 근지러운 옹이,
냉가슴 덴가슴 어루만지며
누대의 흔적을 지우려 하네.
눈언저리에 내린 콩깍지가 벗겨지니 세상이 가차 없다.
눈빛만으로 마음을 읽는 환상을 벗고, 혀짤배기소리도 버리고,
꼬리만 흔들고 혀를 함부로 굴리지 말아야 한다. 궁성 옆에서도 당당한 오두막을 짓고,
눈가에 자란자란 고이는 햇살에 속내를 말린다.
새로운 콩깍지가 필요해. 맑으면서 얕을 것, 함부로 깊어지면 치명에 이르는 눈총을 받는다.
한때 청색 수레국화, 노란 해바라기, 보랏빛 벌개미취에 정신을 팔았다.
그러다 하얀 구절초, 옥잠화, 아기별꽃으로 돌아왔다.
생은 흰 배내옷으로 시작해서 흰 수의로 마감하는 것, 흰색만큼 정한 것이 있나.
지상의 모든 것을 덮는 흰 눈, 잠시의 화평에 기대 위로를 얻는다.
다시 햇살이 내려 구차한 몰골이 드러나도,
무능이 죄가 되지 않고 무엇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탐한다.
Energy from mountain 1 2016 by JAIM
<현대수필> 겨울호 , 통권 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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