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패배는 나의 힘

칠부능선 2014. 7. 31. 22:55

패배는 나의 힘

황규관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시집 『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

 

 

 

‘패배는 나의 힘’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먼저 말한 기형도 시인의 어법을 차용한 문장처럼 보인다. 힘이 되는 패배란 어떤 패배일까.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면 내면 깊이 자리한 오기가 더 단단해졌다는 의미일까. 실패의 원인을 찾아내 다시는 패배하지 않으리란 다짐의 결기인가. 그럼에도 ‘패배가 웃음’이라니. 여전히 묘연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이 판국에 허허 헛웃음이나 새어나올 밖에. 누군가 양 볼에 공기를 집어넣고 풋푸푸 하며 조금씩 바람을 빼가며 따라 웃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시인은 삶에 패배한 그 순간이 바로 노래가 터져 나오는 때라며, 그 노래는 나를 압박해오는 혹독한 삶의 무게를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오는 것이란다. 그러면서 ‘사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아프고 아파서 아픔이 웃을 때까지 천천히 가는 길’이라고 한다. 패배에 자극받아 다음엔 반드시 승리를 거머쥐고야 말리라는 결연한 의지가 아닌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소수의 승자와 그보다 훨씬 많은 패자가 모여 사는 곳이다. 누구나 승리보다 패배가 많은 삶을 살고 있다. 경쟁은 어디나 있고 누구나 이기기를 바라지만 대부분 지고 만다. 결국 패배에 익숙해지는 도리밖에 없다.

‘승승장구’란 한때 TV예능프로에나 있던 낱말이다. 그 내용도 실은 실패와 결핍, 눈물과 굴욕의 기록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승리들은 필연이 아니라 무수한 희생과 고난을 온몸으로 통과한 결과임을 안다. 오늘도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치루지 않을 수 없기에 ‘다시 싸움을 맞는’ 것이다. 묵묵한 오늘의 경기이며 생활이다. 윤동주 시인의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마음이리라. 승리는 선이고 패배가 악이 아니거늘, 어제의 패배로 인한 가득한 열패감에도 불구하고 굴욕을 느낄 것까지는 없다. 어쩌면 오만에 찬 그들에게 이 승리가 독이 될까 걱정이 된다만, 이 앗쌀한 패배가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풋핫하하 공기를 한꺼번에 빼버리고 통크게 웃자. 패배를 웃음과 구원으로 완성하는 길 또한 정의를 승리로 이끄는 다른 방도이기도 하겠거니.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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