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구부러진다는 것 / 이정록

칠부능선 2012. 9. 7. 22:58

  구부러진다는 것

   이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치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구부러지는 힘을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 이제, 말하겠다

  내 마음의 꼭지가, 너를 향해

  잘못 박힌 못처럼

  굽어버렸다

 

  자, 가자!

 

  굽은 못도

  고추 꼭지도

  솟구치는 물고기의 등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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