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압정
이문재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다 밀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다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 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
도 초록빛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이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였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
까 싶었다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다 물기가 남아 있는
씨앗은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다 바람에 불려가는 씨앗은
물기의 끝, 무게의 끝이었다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이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는다 만나는 순간, 이미 이별도 출발한다 민
들레는 꽃대를 밀어올리며 지극한 결별을 준비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속력은 같
다 씨앗 다 날려보낸 가을 민들레가 압정처럼 박혀 있다
'시 - 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부러진다는 것 / 이정록 (0) | 2012.09.07 |
---|---|
「핵(核)」/ 다카하시 아유무 (0) | 2012.06.25 |
연두의 내부 / 김선우 (0) | 2012.04.11 |
올 여름의 인생 공부 / 최승자 (0) | 2012.03.12 |
거문고를 탈 때 / 한용운 (0) | 2012.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