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악어쇼 / 이문숙

칠부능선 2011. 8. 16. 10:04

악어쇼

이문숙

 

 

아무도 없는데 돌아보니

악어 한 마리 입을 벌리고 있어

 

빨간 타이츠를 입은 소녀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주먹을 만들어

벌린 입속으로 집어넣어

 

숨방망이에 불을 붙여

불을 한입에 달게 먹고는

또다시 울퉁불퉁한 이빨 사이로 넣어

 

무릎을 꿇고 천천히 윗몸을 들어올려

잘 휘어진 등 아래로

긴 머리카락을 몇번 흔들다가

머리를 악어의 커다란 주둥이 사이로

 

나도 그 속으로 펜을 쥔 주먹을 넣었다 뺀다

(주먹은 잘라지지 않고)

나도 매일 부글거리는 머리를 넣었다 뺀다

(머리는 동강나지 않고)

 

악어가 입을 다물어 이빨들이 맞물리지 않는 한

악어쇼는 계속되리라

 

포만한 악어는 절대 사냥감을 찾지 않는다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아주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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