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별
그의 혹에서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린다.
가람병원 8층 사막의 경유지에서
아버지는 투명한 비커 속
잠잠해지는 모래바람을 본다
오래전 물이 마른 웅덩이 일까
떼어내지 못한 담낭, 가뭄은 상처가 깊어서
소변을 보고 돌아누운 어깨가 흔들린다.
하루 세 번 비커에 소변을 받고
사막의 모래 돌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때
신기루같은 선잠에 드는 낙타
늘어진 목덜미에 손을 얻으면
흩어지며 무늬를 만드는 모래 알갱이
수많은 아버지들의 무덤, 그의 땅에서는
풍장된 낙타들의 뼈가 만져진다
지린내 퍼져가는 4인실 병동
먹다 남긴 복숭아 캔에 황사먼지가 내려앉는다.
되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걸어나온 낙타 한 마리
비커 바닥에 담석 알갱이들이 샛별로 빛나기 시작한다.
바람의 말줄임표
실밥을 뽑고 할아버지는
잘려나간 길들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한성병원 202호실, 모든 길을 꿰매어논 할아버지가 있다.
병수발 들던 고모가 마중나가 조용한 병실
가습기 연기가 야윈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발톱부터 빠져나갔다, 무릎만 남아 균형잃은 다리
창가로 들어온 햇살 한 줌 빈자리를 채운다.
선산에서 다시 찾게 될
왼쪽다리, 할아버지 무릎에 실밥자국으로 남아 있다.
살기 위해 다리를 버린 할아버지는
불사의 길은 알지 못했으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법은 알고 있었다.
잠든 할아버지의 날숨에서 다리를 잘라먹은 단 내가 나고
링거액이 심박수처럼 떨어진다.
달구지를 타고 두렁을 지나오던 날들
썩어버린 시절을 봉하는 마지막 바느질이었고
새로 시작될 바람같은 날들을 향한 말줄임표였다.
실이 빠져나간 자리로 뭉특하게 남은 흉터
할아버지 왼쪽 무릎아래
햇볕이 새 터를 잡는다.
말레이가비알
난간에 걸린 이름표에 김이 서린다.
물 속에 오래 잠겨 있어도 부르트지 않는 몸
악어새가 오지 않는 대공원 파충류관
말레이가비알 악어 두 마리
입을 다물고 환영처럼 사라지는 서로의 몸을 본다.
수조 벽에 긁혀 조금씩 마모되었을 꼬리
좁은 웅덩이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천적이다.
더 이상 얼굴을 늪 안으로 넣지 않고
늪을 부유하던 몸은
수조의 물 위를 떠다닌다.
꼬리를 휘두르며 사냥하던 육식의 본능은
이제 사육사가 주는 고기를 받아 먹는 것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찍던 남자
움직여 보라는 듯 난간을 발로 찬다.
챙, 하고 진동하는 난간에도
다문 입을 열지 않는다.
청각부터 굳어 가는지
떠날 준비를 하는지
말레이가비알, 말레이시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악어 두 마리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간다.
요철무늬 사이가 깊게 패인다.
구세군
올해도 서울역 앞에는 산타가 온다.
종소리에 맞춰 흔들리는 자선냄비
생의 밥그릇은 항상 저렇게 비어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저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한 번의 헛발질로 미끄러졌을까, 저 남자
아득한 시절로 돌아가는 차표는 영영 끊겼는지
비둘기처럼 모여든 사내들의
뜯어진 신발 틈으로 비져나온 맨발이 환하다.
몇 번이나 담배를 구걸하다 체념대신
여러번 누빈 이불보를 덮고 누운 남자
종소리, 캐롤소리 듣는지
끊기지 않는 선율 따라 붉은 냄비가 흔들린다.
마이크를 든 산타가 종착역을 알리는
역장처럼 목청을 높인다 또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개찰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동안
밤은 거대한 이불보를 펼친다.
털어낸 솜이불에서 오래 묵은 먼지를
첫 눈발을 날리고 있다.
처녀자리의 계절
할머니는 죽어서 처녀자리가 되었다.
한별 아파트 202호
아버지가 옥매트 전선을 묶는다.
삼촌과 인부가 자개장롱을 들어 옮기고
하나씩 비워지는 방
엄마는 노끈에 묶인 점성책을
통재로 들어 현관에 내놓는다.
누렇게 변한 책 귀퉁이
곳곳이 접혀있다.
오래된 책 냄새가 현관을 매운다.
운세는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
매일 아침 각자의 운세를 짚어보고
호통을 치던 할머니는 별이 되었다.
움직이지 않던 별자리도 서쪽으로 이동하는 겨울
높아지는 하늘이 보인다.
계절따라 별자리도 바뀐다고
점성을 좋아하던 할머니는
계절을 따라 가셨다.
당선소감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7반 정예림)
제게 문학은 한 없이 높은 산이었습니다. 열심히 오르다가도 정상은 보이지 않아서 주저 앉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체로 일상에서 겪었던 것을 시로 씁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다리에 남은 바람의 말줄임표와 아버지의 안에 있는 사막을 보면서 꼭 한 번 시로 써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야생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말레이가비알 악어를 보면서 그들의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하고 싶었습니다.아마 제 나이의 또래들이 걱정하는게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가, 일 것입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김유미 선생님과 윤한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재작년 항상 저희에게 웃음으로 가르침을 주신 유한칠 선생님과 항상 못난 딸을 응원해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하다 전하고 싶습니다. 높디 높은 문학의 산을 걸으면서 만난 27기 문창과 동기들, 물동이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한 없이 부족하고 더 배워야 할 저에게 이런 큰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기회는 저에게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태하던 자신을 혼내고 더욱 열심히 하라는 문학에 정진하라는 뜻의 상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산에 올라 야호를 외칠 수 있는 그 날까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노력하는 문학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정예림 씨의 「낙타의 별」 외 4편은, 삶의 중심을 투명하고도 절절하게 바라보는 짙은 페이소스가 남달라 보였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언어를 통해 신인으로서는 매우 안정된 시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구체성 있는 서사를 밑거름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짧은 호흡 속에 서정적으로 구성하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낙타의 별」에서는, 병실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영상과 삶을 낙타의 그것으로 비유하면서도, 그 안에 감각적 선명함과 함께 별로 빛나는 서정의 결기까지 보여줌으로써 삶의 형식을 바라보는 깊이와 너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전체적으로 응모작들이 균질적이고, 관찰과 고백의 투명성과 함께 그러한 시선을 미적으로 탈바꿈하는 능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심사위원들의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뽑게 되었다.
심사위원 :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동국대 겸임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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