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은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소원이란 것이 별 게 아니구나. 언뜻 생각했다.
그러다 찬찬히 읽어보니 그게 아니다.
적막의 포로가 될 시간이 없다. 실속없이 동동거리는 것을 보면 한심할 때가 많지 않은가.
궁금한 걸 없애라니... 아침 저녁 국제전화에 매달려 안부를 전하고 묻고,
그래야 안심 하는 소심증에 걸렸는걸.
이게 젤루 어렵다. 호기심을 없앤다는 건 초탈, 아니면 포기상태인데.
아무 이유 없이 걸을 수는 있다. 안 그래도 밤산책을 하고 있는데....
건강을 위해서라는 구실만 떼어내면 가능하다.
나락 냄새라니, 나락에서 가을볕 냄새가 난단 말인가. 이건 가을 들판에 나가보면 되겠네.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그래, 더 이상 인연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잡다한 일도. 용량초과다 이미.
가끔 소낙비 흠씬 맞을 기회는 있다. 꾸물꾸물한 날 저녁 산책에 우산을 안 가져가는 것이다.
신경을 곧추세우면 가능하겠는데.
혼자 우는 것, 가끔 잘 한다.
울다가 임종하기는 싫은데...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건, 가벼워지라는 뜻인가.
초록은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앞으로도. 태생적으로 회색이나 갈색을 좋아했으니까.
뭔 동문서답이냐구.
가을의 초입에 가을의 소원을 걸어두니 널널하다.
이제 시작이니까.
Eric Andersen - Chinatown
[Memory of the Future],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