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는 아름답다
우는
남자의 가볍게 흔들리는 등을 본적 있는가.
비
오는 창밖을 보며 좋은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릴 줄 아는 남자.
슬픈
영화를 보며 애달픈 사연을 들으며 함께 펑펑 눈물을 쏟을 줄 아는 남자.
우는
남자, 울 줄 아는 남자는 아름답다.
든든한
기둥으로의 등이 아닌 감정에 복받쳐 주체할 수 없는 등의 거센 진동,
이런
남자의 흐느끼는 등을 바라보며 어찌 마음이 열리지 않겠는가.
분노 혹은 슬픔을 다 토해내고 비로소 맑은 얼굴이 될 때까지 그의 등을 지켜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들은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부정과
부조리에 저항할 힘이 부칠 때 남자들은 울지 않고 분노한다.
우는
법을 잊은 시간부터 남자의 속뜰은 황량해졌을 것이다.
남자가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갖기에는 만만찮은 세상이 되었다.
가부장의
권위는 더 이상 보장권이 아니다.
절대
권력의 위엄만으로 기득권을 발휘하지 못한다.
성을 초월한 가부장다운 가부장만을 원한다.
200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기존의 남녀간의 성체계에 대해
도발적인 글을 쓰는 작가다.
실험적이고도
무자비한 여성 차별의 문제를 고발하고 일방적인 지배나 종속적 사랑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랑의 허구성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부당한
가부장제도에 대해서 도전적이며 선동적인 글쓰기로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옐리네크, 비주류문학의 노벨상수상은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경제 비판이 깔려있다.
권위주의적
가부장 사회를 조장하는 것이 여성 자신의 우매함과 천박함이라고 해서
여성운동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성숙한 페미니스트의 자세가 아닌가.
그는
작품에서 비범한 언어적 열정으로 사회의 진부한 사상과 행동,
그것에 복종하는 권력의 불합리성을 일깨워준다는 것이 노벨상 선정 이유였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보호의 대상이던 시대도 지났다.
미소나
눈물로 모든 것을 용서받는 꽃은 아니다.
가정과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할 때만이 여자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남자는
이제, 가부장의 무거움에서 해방되어도 좋다.
자기
노력으로 남자가 되지 않았듯이
여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여자가
거칠어지고 남자가 위축된 듯한 역균형의 현상은 한시적일 뿐이다.
남자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다.
사랑과
연민의 대상으로서 끌어안아 품을 준비가 이미 여자 안에서
모성을 통해 시작되고 있었다.
외신에서 한국인의 이미지가 투쟁적이라고 한 것에 부당한 느낌을 받은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오늘이다.
단상에서
벌이는 막말의 핑퐁게임, 예전에 보이던 몸싸움보다 한 수 위인지도 모른다.
은유가 멀어지고, 풍유는 더욱 멀어지고, 직유만이 무차별로 서로를 공격한다.
진보, 개혁이라는 꿈을 담은 싱싱한 언어가 불황, 실업이라는 불안의 진창에 이르렀다.
남자의 눈물이 더 이상 금기가 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좀 더 멀리,
깊게 바라보는 우리 안에 겹눈이 제 기능을 할 때 남자가 눈물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깨닫게 될 때 세상의 폭력성은 없어질 것이다.
운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남자란 얼마나 안쓰럽고 살벌한가.
눈물이 남자를 해방시키는 탈출구일지도 모른다.
눈물은 더 이상 여자만의 무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