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좋은 죽음

칠부능선 2006. 7. 28. 21:55

                          좋은 죽음

                                                             



  컵이 깨졌다. 산산조각 난 파편을 수습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야향화 화분에 물을 주고 옮기는데 화분이 두 동강이 났다.

물에 젖은 흙이 아이보리색 카펫을 점령한다.

우산을 떨어뜨리고, 쓰레기통을 넘어뜨리고 잡는 것마다 미끄러져 나간다.

이 황망함이라니. 내 몸에서도 기가 다 빠져 나갔나보다. 오빠가 떠난 후 한동안 내게서

일어났던 일이다.

  주검을 처음 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염습하는 사람들의 껍데기에 대한 예의는 정중했지만, 이미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사라졌다.

의지를 버린 굳은 육신은 순했다. 비로소 순종하는 차가운 물체에 불과했다.

66년 동안 보낸 이 땅의 정한과 고통을, 때로는 환희와 기쁨을 그 몸은 기억하고 있겠지.

  오빠의 몸속에서 암이 창궐하는 동안,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외마디 비명도 없이

내색도 없이 혼자 견딘 것을 우리는 가슴 아파했다. 결국은 혼자 감당해야할 몫이지만,

아들 외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맞은 임종을 두고 독하다며 우리는 서운해 했다.

  둘째오빠의 죽음은 느닷없는 사건이었다.

오빠 셋 중에서 가장 강건한 정신과 육체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인 운동과 빈틈없는 성격으로 집안의 든든한 기둥이었다.

  오빠는 아들 셋 중 신동소리 듣던 큰아들을 사고로 먼저 보내고, 아내와 이른 사별을 하고,

오래지 않아 재혼을 했다. 두 번의 결혼 모두 단란했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에 품은 고통이 많았는지 나이 50 중반에 직장암 선고를 받았다.

  평소 성격대로 열심히 투병하던 중 신앙에 귀의해서 신학공부를 하더니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신앙으로 무장한 오빠는 한동안 평안해 보여서, 병을 다 털어버린 줄 알았다.

우리가 불안을 잊고 지내던 사이 오빠는 신앙 안에서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영안실 풍경은 평화로웠다.

울부짖는 사람도 없고 왜 이리 빨리 가느냐고 원망하는 사람도 없이 그저 담담했다.


  한국죽음학회가 생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에 집착이 강하고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죽음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이 안타까워 생긴 학회라고 한다.

  죽음학은 종교학자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존엄성을 지키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죽음은 죄나 벌의 결과가 아니라 잠시, 혹은 긴 여행에서 예정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불변의 사실을 자주 외면하고 산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의 경구는 언제나 유효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방식이 있듯 죽는 데도 방식이 있으며,

어떻게 죽는지를 보면 그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인도출신 철학자 카마스는 말한다.

역사적 인물의 죽는 모습을 통해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들의 죽음은

용기 있고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주장을 폈다.

  성인(聖人)들이 자청해서 겪는 보속으로의 고통을 생각하면 역사적 인물의 평온한 죽음만을

동경할 것은 아니다. 누군들 의지 밖의 나날을 원하겠는가.

누군들 고통에 시달리는 최후를 바라겠는가.

 죽을 때의 모습이 삶에 대한 마지막 평가라면, 죽음 앞에서조차 긴장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고달프지 않은가.

있는 그대로 맑은 정신으로 주위에 폐 끼치지 않고 가는 것은 좋은 죽음이다.

이런 평온한 죽음은 절대 복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확실한 사실을 알면서도 죽을 준비는 하지 않는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길한 ‘사건’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죽음처럼 공평한 것은 없다. 연륜의 차례가 아닌, 알 수 없는

그 시간 또한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로인해 우리는 조금은 더 겸손해지지 않는가.

노화와 죽음을 생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준비의 시작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들끓는 욕심과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다스리지 못한 욕심에 대해, 멈추지 않는 욕망에 대해 뉘우치는 일은 기쁜 일이다.

  지금, 살아있음에 환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아직 죽음이 먼 이야기로 느껴지는 것은 복된 일이다. 이 몽매한 기고만장도 잠시다.

예고 없이 어느 날 열정은 싸늘히 식고 굳은 육신만 남을 것이다.

  조선조 선조들의 죽음계획을 보면 삶의 미련을 남게 하는 재물을 줄이고,

살아오는 동안 생긴 크고 작은 원한을 풀어버리고, 남에게 진 정신적 물질적 빚을 청산하고,

정든 사람과 물건에 대한 애착을 끊고 마지막으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돌연한 죽음이 가장 좋은 죽음이라고 하지만 누구는 회개할 시간이 없음을 염려한다.

선조들의 사계문화(死計文化)를 슬기로움을 본받는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죽음에는 어떤 예감이 있는 듯하다.

의식하지 않고 준비된 일들을 죽음 후에 돌이켜보며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오빠가 주변정리를 말끔히 한 것을 보면.

  잘 살아내는 일(wellbing)이 바로 잘 죽는 일(welldy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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