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92 퍼센트 / 노정숙

칠부능선 2023. 9. 12. 18:20

 

 

92 퍼센트

노정숙

 

 

요즘, 사람들의 말이 잘 안 들어온다.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해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귀지가 막고 있는 것은 아니라며 청력검사를 해보자 했다. 방음부스가 설치된 검사실에서 헤드폰을 쓰고 소리가 들리면 버튼을 누른다. 몇 개의 헤드폰으로 바꿔 써 가면서 검사를 했다. 가늘고 긴 음, 투박하고 강한 음이 들릴 때마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90~100%가 정상범위인데 나는 92%라고 한다. 수치로는 정상에 속하는데 왜 놓치는 말이 많아졌는지. 어음청력검사는 일상의 의사소통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청력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한 번에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졌다. 내가 듣지 못한 말은 내게 필요하지 않는 말이라고 억지 마음을 먹는다. 이 여우의 신포도 비유는 내 태평의 거름이다.

 

얼마 전, 친구 부부와 대마도에 갔다.

상쓰시마와 하쓰시마를 이어주는 만관교 위에서 영화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풍모의 신부님을 만났다. 울산에서 왔다는 신부님은 뇌경색을 두 번 앓고 일찍 은퇴했다고 한다. 늙어서 혼자 사는 건 너무 안 좋은 일이라며 아내한태 잘하라고 한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우두머리는 자신의 고집만 세우지 말고 화합해야 한다는 말씀. 그 별스럽지 않은 일을 우리는 스스로 겪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남편과 친구는 도무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사투리 섞인 어눌한 말이 내 귀에는 잘 들어왔다. 내가 이해하는 음역 수준이 이렇게 넓다는 건가.

오래전에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조용한 이즈하라, ‘李王家宗家伯爵御結婚奉祝記念碑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 팻말을 따라 들어가 보니 소가문이 살았던 금석성터 안에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가 있다. 조선왕조를 이가왕조로 표기한 것부터 마음이 걸렸다. 우리 입장에서는 결코 봉축할 일이 아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빼앗긴 나라의 백성은 물론 왕족도 바람 앞에 촛불이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행복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8살에 아버지를 잃고, 13살에 일본에 강제 유학을 가서 24살에 대마도 36대 도주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했다. 시댁인 이곳에 첫인사를 왔을 때 이미 병증이 깊었다. 멈추지 못했다는 옹주의 웃음소리가 통곡이 되어 귀에 맴돈다. 어찌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있겠는가.

결혼봉축기념비 아래 시든 꽃다발과 사각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진 동전과 돌멩이, 이걸 기념품이라고 하는지. 나는 뭐라도 준비하지 못한 것이 또 걸렸다. 한때 산에다 버렸다가 다시 찾아왔다는 사연도 착잡하다. 시간이 멈춰버린 쓰시마, 쓸쓸하고 씁쓸한 흔적들. 칼로 상징되는 이 나라의 역사는 통곡이 없어, 슬픔마저 모질고 독하다. 기념비 앞에서 귀가 먹먹하더니 아예 캄캄해졌다.

 

귀의 성능이 감정의 지시를 받는 듯하다. 가까운 사람과 대화중에 뭐라고? 응? 이런 반문이 많아졌다. 서로 집중하며 듣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언가 헐거워진 게 분명하다.

한때는 말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내가 터득한 건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말을 잘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 생각에 거슬리는 말을 들으면 격해진다. 끝까지 잘 듣지 못하고 반격의 직구를 날리며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세월의 힘은 생각을 굳게 만들었나 보다.

‘말랑말랑한 노인’이 내 꿈인데 깜빡깜빡 잊는다. 노인이 되는 건 벌도 상도 아닌 자연현상이다. 노인이 되면 한 말을 자꾸 또 하고, 질문을 하고는 듣지 않고 또 다른 말을 한다. 호기심과 하고 싶은 말 사이 균형이 깨졌다. 일방통행이기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듣는 기능을 잃는 게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보다 귀가 부실해진다. 일찍이 귀를 닫는 것은 기운이 승해서다. 나중엔 입도 귀도 다 닫힌다. 나는 자꾸 어머니가 걸어온 길을 더듬으며 내 위치를 가늠한다.

청력검사 결과 92%는 90부터 시작하는 정상범위를 반영하면 10점 만점에 2점인 거다. 셈법 모자란 내 긍정은 늘 이런 식이다. 100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괜찮은 수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내 어음분별 능력은 서서히, 어쩌면 급격이 떨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게 아픈 말은 밀어내고 유리한 말만 받아들이길. 어떤 말이나 끄덕이는 팔랑귀가 되기를. 눈만 마주쳐도 싱긋 웃는 후한 노인이 되길 바란다. 다행인 건 누구나 귀보다 입을 먼저 닫게 된다는 사실이다.

 

<에세이문학 > 2023년 가을호 통권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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